Tuesday, December 28, 2010

올해의 마지막에

접어들며
나는 신나게 영화를 때리고 있다

아마도 어제오늘 본 영화만 열편은 넘을 것 같다

한살한살 더 먹으니까
좀 잔인한 영화는 보기 싫어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자극적인 영상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좀 느려도 좋으니 들 자극적인 것이 좋겠다 하며 봤는데
어떻게 된 것이 전부 폭력적인 영화들을 보게 되었다

그중 최고봉이 기타노 다케시의 아웃레이지.
아 그래도 나는 그의 영화를 미워할 수가 없다.
음화.

암튼간에 아주주주주주주
잔인했다.

김지운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보다
더 잔인한 것 같았다
잔인한 걸로 치면 둘다 장난아니지만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서는 뭐야 라는 비아냥이 섞인 한숨이 나왔다면
아웃레이지의 폭력은 깔끔하게 떨어져서 한숨이 사사삭 잘려나가
한숨을 들이켰다는 사실 마저도 잊게 만드는....(엄청 긴 서술..끄윽)
그런 것이었다.

폭력하니 아자쒸도 생각이 난다
정 말 잔인했다 ....
살인장면이 너무너무 잔인해서 아주 그냥
특히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서
보는 내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 저럴까
역겨웠다

사람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원빈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잘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나도 완전 공감하면서 봤다

마지막에 한번 안아보자 아이를 끌어 안았을떄
나는 손발 오글거림에 죽을 맛이었다
개인적으로 원빈이 내 스타일이 아니었.......음에도
암튼 잘 생긴 사람이 쌩쌩 액션하며 이겨대니
그 폭력마자 미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침묵.

나는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아마도 내가 순수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것인지.

설경구의 해결사도 보았다.
완전 한국영화퍼레이드였는데...

폭력의 수위는 내가 어제 오늘 본 다른 영화보다 낮을지 몰라도
재미도 별로였다
뻔한 스토리에 뻔한 액션신 뻔뻔한 폭력에 대한 이유들
말도 안되는 이유들!!!!!!

또 뭐 봤더라....아 브루스 윌리스 나오는 그 영화....로보트....음 Surrogates를 봤다
남편님 피에스뜨리 이용해 본 이 영화는...
솔직히 연출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내까지것이 뭘 그리 많이 아나만 ㅋ)
내용도 너무 좋고 뭔가 더 좋은 영화가 나올 뻔 한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하다고 해야할까
처음에는 블레이드 러너 같은 뭔가 나올까 기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괜히 평점이 그리 낮은 것은 아니었다.

아 갑자기 블레이드 러너가 보고 싶당. 오늘 볼까.......
그래도 보고나서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

또 무슨 영화를 봤는지..............아 기억 안난다.
이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보려고 한다.
혼자보면 무서울 것 같아서 남편이랑 같이 봐야겠다.

올해의 마지막에...라는 글귀로 시작했는데
나는 온갖 폭력영화에 대해서만 늘어놓았다.
케케케

요즘 본 영화줄 최고는 걸어도 걸어도이다.
최고 폭력 영화도 일본 영화였는데
최고 감명있었던 영화도 일본영화네.

연말에 보면 좋은 영화인 것 같다.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도 주고
해야할 일을 미루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하고
무엇이 살아가고 있는 그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잊지는 않고 있는지 묻게 해주는

아주 천천히 빠르게 알려주는 아주 좋은 영화이다.






올해의 마지막에... 아 아직은 그리 마지막은 아니잖아.

Monday, December 27, 2010

[옥희의 영화]

내가 홍상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이보다 더한 코메디가 없다는 구나

Sunday, December 5, 2010

사람

사람사람

사랑사랑

Thursday, November 25, 2010

오랜만에


타락천사




7:07

Wednesday, October 27, 2010

[요즘]

회사는 아주 즐겁게 다니고 있다
돈 버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남편은... 하니까
어제 정말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 생각이 난다.
친구말에 내가 남편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이상하다고 한다.
암튼
남편은... 요즘 엔비에이가 다시 시작에
오늘은 닉스의 첫 경기라 아주 열심히 보고 있다.

나는 내 컴 앞에 앉아서 드라마 한편 때리고
그러는 통에 저녁을 따로 먹었다
그래도 농구소리가 들려서 멀리 있지 않은 것을 아니 마음이 놓인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싸이에 들어가 보았다
싸이를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가보면 친구들 소식도 보고 좋다.

믾은 친구들이 글쎄
벌써 아이들이 둘이나 하나씩은 있다.

이곳에 있으면 별로 나한테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

아이들을 무지 좋아해서
내 아이면 얼마나 더 이쁠까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생명이 없겠지만.

그러다가 내가 어렸을 때 정말 좋아했던 만화영화들을 생각했다
정말 쌩뚱맞다...푸하핫


내일은 조한테 쌩뚱맞다라는 말을 가르쳐 줘야겠다

목사님께서는 나보고
Scatterbrain이라신다
하도 이야기하다가 주제를 바꿔서...

그런데 내 글도 그런 것 같다
푸라ㄹ하하

Wednesday, September 8, 2010



1994년 어느 늦은 밤

장혜진

오늘밤 그대에게 말로할수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종이위에 글로쓴걸 용서해

한참을 그대에게 겁이 날만큼 미쳤었지
그런 내 모습 이제는 후회할지 몰라

하지만 그대여 다른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얼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랑하는 지를
외로이 텅빈방에 나만 홀로 남았을때

그제야 나는 그대 없을음 알게 될지 몰라
하지만 그대여 다른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얼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랑하는지를

그대 이제는 안녕

Wednesday, August 25, 2010

푸하하

바로 전에 써 놓은 포스트를 읽고
깜놀했다

뒷심부족
뒷심부족했는데

그래도 하나님 도우심으로
잘 끝내서

푸하하
다.

여튼 (오늘 본 영화의 영향)
난 잘 댕기고 있다

Thursday, July 15, 2010

뒷심부족

나의 고질적인 문제.....다


인터뷰를 2번하고
프로젝트도 2번하고

뭐든 처음할 때는 어느정도의
긴장감과 열의가 있고
산뜻함과 새로움에 대한 신선함
등등 나를 업 시키는데

...

하여간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는데
반 이상도 못이긴 것 같다..

뭐든 진득하게 꾸준히 하는 사람을 보면은
정말 부럽다.

아아아

Friday, June 25, 2010

영화 박치기와 정대세 (기사스크랩)

[오마이뉴스 여영화 기자]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 브라질 전에서 북한의 정대세가 굵고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우리는 왜 정대세의 눈물 앞에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일까? 우리는 브라질에 아무 원한도 없고, 북한은 어쨌든 공식적으로 외국 혹은 적국(?)일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또 북한은 계속된 대 포르투갈 전에서도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가. 포르투갈 역시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을리도 만무한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리라. 당신도 나처럼 정대세의 눈물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면, 당신도 나처럼 7:0의 참패를 보고 한참동안 비참한 심정에 맥이 탁 풀렸다면, 우리는 함께 이 작은 사건 앞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정대세의 눈물은 과연 정대세만의 눈물인가? 그리고 그저 정대세만의 눈물로 끝나도 되는가?

2010년 남아공에서의 정대세의 눈물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1960년대 일본으로 공간을 옮기자. 이제 영화 < 박치기 > 가 시작할 참이다. 그 전에 먼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꼭 살펴보아야 한다. 수십 년간 우리가 몰랐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었던 실로 절절한 진실의 역사를 들추어 보아야 한다.

정대세의 눈물을 보며 영화 < 박치기 > 를 말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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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세의 눈물 북한 축구대표팀의 공격수 정대세(26)가 16일 새벽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엘리스 파크 경기장에서 열린 첫 경기 브라질전 식전행사에서 북한국가가 울려퍼지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로이터=뉴시스


영화 < 박치기 > 의 배경인 1960년대 교토, 자이니치(在日, 재일한국인) 1, 2세대가 살고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주로 강제납치 등 우여곡절 끝에 일본땅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하여 일본에서 생활 터전을 구축해야 했다. 그리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땅에 남은 조선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일상적 폭행, 살인협박, 모욕, 수치, 조롱, 멸시 등 차별이라는 단어가 포함할 수 있는 모든 불이익과 천대를 받아야만 했다. 민족적 차별은 사회적 차별로 연결되어 이들은 교육, 의료, 주거, 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제도적으로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남한보다 북한의 경제력이 우월했다. 북한은, 체제경쟁의 일환이든 어쨌든간에, 같은 동포라는 역사의 진실, 한 핏줄이라는 혈연의 진실 하에 자이니치에게 거액의 지원을 하기 시작한다. 강도 일본의 땅에서 개처럼 차별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주춧돌을 놓는다.

남한은 어땠을까? 체제경쟁을 하면서도 자이니치만은 철저히 외면한다. 경제력이 북한을 앞지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치욕스런 한일협정 이후, 남한은 일본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재일동포에 대한 모든 민족적, 사회적 차별에 대하여 철저히 외면한다. 자국민이 일본인에게 어떤 짐승같은 취급을 받든지 말든지 모르쇠로 일관한다. 국가의 자국민 보호의무를 철저히 내팽개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자이니치 지원은 수십년간 단 한 해도 중단되지 않았다. 북한이 대기근으로 허덕일 때도 변함이 없었다. 이는 북한의 자이니치 지원이 단순한 체제경쟁으로 볼 수 없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애시당초 권력담당자들의 역사인식과 국가도덕성 자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북한의 체제경쟁이 역사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인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구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체제우위를 확보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남한의 체제경쟁은 역사를 도외시하고, 외형적으로 국가 그 자체의 덩치를 키우는 것에 중점이 있었던 것이다.

자이니치 보호한 북한, 외면한 남한

북한은 특히 교육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일본사회의 거대한 차별 앞에 짓밟히는 것에 대하여 단호히 팔을 걷어붙이고 울타리를 치고 나선 것이다. 그것이 조선학교, 재일동포들이 스스로 '우리학교'라고 부르는 희망의 보금자리였다. 이로써 일본정부의 철저한 차별과 배제정책 속에서도 자이니치들은 완전히 체계화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질식 직전의 차별에 시달리던 자이니치가 북한의 원조를 통하여 일대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일본에서 차별받고, 남한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북한의 원조는 단순한 금전의 차원을 넘어 생명과도 같은 빛이었고, 또한 눈물겹도록 고마운 빚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본땅에서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은 자신들을 먹여주고, 키워주고, 가르쳐준 북한을 '조국', 즉 어머니와 같은 나라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재일조선인의 대다수가 사실상 남쪽에 고향을 두고 있음에도 남한은 단순한 국적이 있는 나라에 불과했고, 진정한 조국은 북한일 수밖에 없었다. 자이니치의 구조적 모순은 이런 배경 하에서 생긴 것이다. 정대세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북한과 남한의 결정적 차이였다. 내 자식이 돌팔매질 당하고 머리가 깨어질 때 팔 걷어붙이고 보호해주는 부모와 나 몰라라 버리는 부모의 차이였다. 역사의식의 부재, 자국민을 쉽게 버리는 패륜적 국가. 어느 쪽이 정당한지는 삼척동자만 되어도 알 것이다. 국가의 성장이란 자국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은 자명하다. 자국민의 희생을 수단으로 하는 국가의 성장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어설프게 북한을 편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영원한 진리 앞에서, 우리 민족, 우리 공동체, 나와 당신의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최소한 역사적 진실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진리만은 정직하게 직시하고 싶을 뿐이다.

일본인 감독도, 배우도 다 아는 자이니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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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고 학생들이 복수를 하기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


ⓒ 시네콰논


영화는 그 조선학교의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된다.
60년대는 세계의 격동기였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68혁명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났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미국에서는 루터 킹 목사 등을 중심으로 한 시민의 권리투쟁과 반전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남미에서는 혁명의 들불이 타올랐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제국주의로부터의 잇따른 독립과 연이은 내전으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전세계적으로 냉전은 갈수록 심화되고 고착화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안보투쟁과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등 진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치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자이니치 1세대가 무기력하게 받아왔던 처절한 차별을 조금은 넘어서서, 어느 정도 조직적 역량을 가진 2세대로 접어들 무렵의 이야기이다.

위에서 간략히 배경설명을 하였지만, 적어도 이 정도 지식만 있어도 < 박치기 > 를 제대로 보는데 부족함이 전혀 없을 듯하다. 차별, 민족, 이념, 조국이라는 역사적 대의명분과 시대의 격동 속에서 자이니치 열혈청춘들은 그들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 열정, 순수함을 간직한 채 끝없이 차별받으면서도, 열렬히 싸우고, 철없이 사랑하고, 처절하게 고민한다.

죽은 친구의 시신을 둘러메고 피울음을 흘리면서, 끝끝내 그 모든 차별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존환경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마지막에 영화는 이 모든 모순, 대립, 반목, 갈등, 투쟁을 융화하여 조화와 공생의 길을 모색한다.

실제로 북한의 재일동포에 대한 지원은 튼튼히 뿌리를 내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자이니치 중에는 차별의 벽을 뚫고 실력있고 유명한 운동선수, 문인, 예술인 등이 많이 나왔다. 그리고 스스로 자이니치임을 밝히지 않은 인물들의 수까지 합하면 그 역량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일본의 현대 문화예술사에서 이들의 이름을 빼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상당히 무색해질 정도이다. 하지만 정치계만은 예외였다. 일본 중의원이었던 아라이 쇼케이(박경재)가 유일했다. 보수적인 일본정계의 핵심부에 들어갔지만, 결국 차별의 벽을 뚫지 못하고, 사실상 암묵적인 정치타살을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비운의 삶을 거두었다.

일본인 감독은 이토록 무겁고도 처절한 이야기를 만화적 상상력과 과장법을 동원하여 유쾌하게 풀어간다. 그러나 결코 리얼리즘을 놓지는 않는다. 자이니치들의 어설픈 우리말 연기까지 훌륭하게 표현하였으며, 조선고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일상적인 충돌과 패싸움, 버스를 뒤집는 사건, 장례식에서 관이 들어가지 않아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 등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실제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다.

배우들도 대부분 일본인들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배우 오다기리 조부터, 일본의 문근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와지리 에리카, 청춘스타 타카오카 소스케까지 쟁쟁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타카오카 소스케는 2006년 방한하여 "개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 일본은 비열했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해주기 바란다"라고 발언하여 우익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이 영화의 주제곡은 '임진강'이다. 민족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북한노래이다. 60년대 일본의 유명한 밴드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가 불러서 유행하였으나 곧 금지곡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전공투 시기에 최대 애창가로서 투쟁가로 불리워졌다고도 한다(사실 나도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노래를 들으며 쓰고 있다. 애잔하고도 비통한 선율이 가슴을 울린다. 개인적으로 양희은씨가 부른 노래가 참 좋다고 생각한다. 꼭 들어보시길 권한다).

노랫말처럼, 민족이 무엇이든, 국가가 무엇이든, 이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일시적으로 우리의 삶을 가를지라도, 그것이 임진강 흐름을 가를 수는 없으리라. 그것이 역사의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미안하다, 정대세 선수...할 수 있는 게 없어 더 미안하다

대 포루투갈 전 직후, 정대세는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자이니치는 우리가 받았어야 했을 그 고통을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대신 짊어졌다. 해방은 되었다지만 온전한 해방이 되지 못한 탓에 그 부작용은 자이니치에게 그대로 전가되어 버린 것이다.

자이니치는 일본에서는 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조센징'으로, 한국에서는 이념이라는 이름 하에 '빨갱이'로, 북한에서도 종종 '반쪽바리'로, 같은 자이니치 내에서도 소속에 따라 배신자로, 삼중 사중의 차별과 고통을 받았다. 자이니치의 삶이란, 일제강점기부터 군부독재를 거치며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일상의 생활영역에서 알게 모르게 조금 조금씩 받았던 차별, 사회적 모순, 부조리, 부패, 불의 등 우리의 모든 아픈 역사의 응축이었다.

영화 중,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가 되기 위하여 북한으로 가는 리안성의 작별잔치에서 1세대 자이니치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본은 나가라고 하지, 한국은 돌아오지 말라 하지. 적십자도 묵묵히 있지. 민단 놈들은 북쪽은 지옥이라면서 지껄이고 있어!" 또 일본애들에게 폭행 당하고 도망가다 죽은 '재덕'의 장례식 날, 장례식에 참석한 극중 '경자'를 사모하는 일본인 청년 쿄스케에게 피맺힌 울음을 토해내는 장면도 있었다.

"돌아가. 넌 이제 돌아가. 너한테 말해줄까. 일본어로 말해주지. 나가! 쪽바리. 너 '요도가와 강'의 바지락 먹어본적 있어? 제방에 피는 야생초 먹어본 적은 있어? 우리나라에서 모내기를 할 때였지. 종이 쪼가리 들이대더니 트럭에 실어버리더군. 할머닌 우셨어. 질질 끌려가며, 밭을 뒤집으며 우셨다구. 부산에서 배로. 바다에 빠져 죽어버릴까 생각했다. 고향이 텅 빌 정도로 끌려왔다고!!! 너희 일본애들은 알고 있나? 몰랐으면 앞으로도 쭉 알 수 없겠지. 멍청한 놈들. 우리들은 너희들과 다르단 말이다. '이쿠마터널' 누가 팠는지 알고 있어? 국회의사당의 대리석 어디서 가져와서 누가 쌓아올렸는지 알고있니? 너희들이 뭘 알고 있어. 단 하나도 모르지 않는가. 나가 주게. 일본인이 남긴 돼지먹이 훔쳐먹고 야쿠자한테… 망보는 야쿠자한테 두들겨맞고 다리가 구부러졌다고. 내 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 넌 없었으면 좋겠다. (정중하게) 돌아가…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그대들에게 미안하다. 그대들이 끝없는 차별과 고통 속에 신음할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서 미안하다. 일 개인으로서 나 하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대들에게 미안하다.

우리가 가진 말로는, 아무리 찾아도 '그대들' 이상의 단어를 쓸 수 없어서 더더욱 미안하다. 자이니치라고 하든, 재일한국인이라고 하든,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든, 재일동포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간에 그대들을 타자(他者)로 칭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미안한 것이 있다. 북한 선수들은 전용 훈련장이 없어서, 먼 이국땅 남아공의 동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 유니폼이 부족한지, 정대세 선수가 안영학 선수가 입던 유니폼의 등쪽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프린팅한 옷을 입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포르투갈 전에서는 상대선수들은 비올 때 특별히 신는 우천용 축구화를 신었는데 북한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직후 김병지 해설위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비가 올 땐 접지력 좋은 플라스틱 축구화(밑바닥이 쇠로 된 것)를 신는데 이것을 신은 포르투갈 선수들과는 달리 북한선수들은 신지 않았더라. 혹 축구화가 없어서는 아닌지? 비가 오면 미끌어져서…"라고 글을 남겼다고도 한다. 이런 점도 나를 안쓰럽게 한다. 아마 김병지 해설위원도 나와 같은 마음이기에 그런 글을 남겼을 것이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왜 우리는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인데, 열악한 환경에서 비를 맞으며 처절하게 싸우는 저들에게 축구화 하나도 못 사준다는 말인가. 반세기 전에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댔어도 그건 주변 열강들의 이해타산에 놀아난 것이니 우리 모두는 결국 같은 피해자가 아닌가. 그걸 우리 모두가 다 아는데,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가 없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 서로를 미워해야만 하는가.

북한보다 수십배 수백배 잘 살게 되었으면 도와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왜 우리는 많이 가지고도 이렇게 옹졸한 잡배가 되어야만 하는가. 가진 자가 베풀지 않고, 강한 자가 너그럽지 않고 갈등을 푸는 길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미 과거의 우민이 아닌데, 왜 아직도 주변 열강의 꼭두각시 놀음과 정치인들의 술책에 바보처럼 놀아나야만 하는가.

이제 우리의 축구를 하자, 하나의 우리

이처럼, 정대세의 눈물은 사실 우리의 눈물이었다. 이제 한 자이니치 청년의 고뇌에 찬 눈물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자. 승리의 눈물이든 패배의 눈물이든 간에 우리 모두 함께, 그리고 당당하게 부둥켜 안고 웃고 울자.

어제는 정말 진다는 것이 억울했다. 한국이 졌을 때도 억울했지만, 북한의 패배는 그와는 또 다른 씁쓸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에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7:0으로 대패하는 북한 선수를 보는 마음이 눈물이 날 정도로 애처로웠다.

한골 한골 들어갈 때마다 움찔 움찔 오금이 저리고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와 같이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면 우리 내면에 무언가 뜨거운 공감대적 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냉전적 이념 따위 녹여버릴 수 있는 뜨거운 인간애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세기 이상, 주변 열강의 꼭두각시 놀음에 휘둘려왔다. 지난 1세기 이상 서구에 대한 근거없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잘 살아봤자. 그것이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상상력도 경쟁력도 곧 밑천을 드러내보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쏟아붓고, 좋은 감독을 영입하고, 애국심을 복돋우고, 할 수 있다고 외쳐봤자, 그건 어차피 반쪽짜리 축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한국의 한계이다. 우리는 아무리 죽어라고 해봤자 위쪽이 막힌 상황에서는, 대륙으로 달려나갈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서로 교류할 수 있고, 서로 도우며 잘 살 수 있다는 상상력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옹졸해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은 공간의 지배를 절대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대륙적 기상과 진취적인 상상력, 당당한 패기를 가질 수 없다.

대북관계에 있어서 일부 부도덕한 정치인들이 뭐라고 현혹하든, 우리는 우리만의 지혜를 가지자. 옳고 그름을 분별하자. 이념 따위 우리는 모른다. 누가 나쁜 놈인지 좋은 놈인지 잘 보고 잘 판단해서, 남북한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키워주고 밀어주고 응원해주자. 그래서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해서 한번 원껏 뛰어보자. 지난 10년간의 평화적인 분위기가 연속되었다면 이번에는 단일팀이 나갈 수 있었는데 과연 누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망쳐버렸는가.

< 박치기 > 수상경력


2005년 아사히 선정 베스트영화 1위
마이니찌 영화상 일본영화 대상
마이니찌 영화콩쿨 음악상
닛간스포츠 영화대상 작품상
일본아카데미 영화상 신인상
일본아카데미 영화상 우수작품상
일본아카데미 영화상 우수감독상
일본아카데미 영화상 우수각본상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 신인남우상
등 2005년 일본의 13개 영화상 가운데 30여 개 부문을 석권하여 일본 열도를 뒤흔들며,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의 국민 여동생 사와지리 에리카는 이 영화로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국내에서는 2006년 CQN명동에서 단관개봉했다.


승패는 중요치 않다. 지구상 어느 나라든, 그 나라가 남북 분단이 되어서 남북 양팀 모두 깨진다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가소롭겠는가. 두배로 깨어지는 것 아닌가.

또 한쪽이 이겨봤자 반쪽짜리 승리 밖에 되지 않으니 그것 또한 찝찝한 승리 이상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나아가, 양쪽 다 이긴다고 해도 그것 또한 우스운 것 아닌가. 둘다 잘하면서 따로 따로 팀 보내서 두배로 먹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얄미운 짓인가.

져도 좋다! 이기면 더 좋다! 제발 하나가 되어서 제대로 뛰어보자. 쪼가리 쪼가리 찢겨진 남쪽나라, 북쪽나라 아둥바둥거리는 거 보면서 음흉하게 웃고 있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제발 반쪽짜리 축구, 비효율적인 축구 더 이상 하지말자. 하나의 축구, 우리의 축구를 하자. 그래서 정말 제대로 한번 싸워보자.

Tuesday, June 22, 2010

월드컵)) 한국 vs 나이지리아

오늘 한국이 이기면 확실하게 16강에 진출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라면 모두 이기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터진 나이지리아의 어이없는 골 때문에
아마 우리도 선수들도 힘이 빠졌을 것 같다.

첫골을 먹으면 먹은 쪽에서 경기가 좀 힘들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찌저찌해서 동점이 되고 또 그렇게 해서 경기의 흐름이
우리쪽으로 온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박주영이 찬 프리킥이 완전 정확하게 골문을 흔들었다.
그래서 우리팀은 역전을 하면서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게임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나이지리아는 끊임없이 공격을 하였고
수비가 뚫려서는 늘 중간쪽에 공간을 허락하였다.

그러더니 후반전에 투입된 김남일은 나이지리아에게 피케이를 허락하고
그렇게 해서 동점이 된 것이다.... 으흠

이제 지지만 말아다오 생각했는데
나이지라 선수들은 어쩜 그래도 잘 달려 다니는지
말근육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나이지리아가 더 게임을 잘 한 것 같다.
그런데 몇몇 중요한 골이 들어가지 않아서...

무승부라고 결정이 나고 카메라에 잡힌 것은
이영표와.....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아 염기훈이
부둥켜 안고 기도하는 장면이었다.

특히 이영표는 그 감격을 주여 하며 감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같은 기독교인으로써 참 뭉클한 장면이었다.

Thursday, June 10, 2010

뉴 민홀릭 닷 컴



http://www.minholic.com/

구경오셈!
아이폰이나 아이팟이로 내홈피 저장하면 아이콘으로 내 로고 나오게 했는데
기분 디따 좋음

Wednesday, June 2, 2010

센서스

이러다 paranoia다

정말 만나기 싫었다

으으으으으으으으

결국은 네번째에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무시하고 센서스를 보내지 않았는데

오월초부터 계속 집에 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비지팅을 정말 싫어한다
한번은 집앞까지 온 친구들을 집에 한발자국도 들이지 않고
돌려보냈을 정도다

그냥 예상치 못한 것은 싫다

그렇지만 인생이 뭐 항상 예상할 수 없는데다가.....

설마 또 오겠어했는데
또 와서 그냥 문을 열어주었다.

이름, 생일.... 그리고 전번.

그냥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센서스 오피스에 전화를 해서.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의 아이디를 확실하게 보질 않아서
난 어째서 이렇게 물렁물렁한걸까
이름을 JOHN L.....까지밖에 못 본 것이다.

그래서 전화해서 누가 집에 왔었는데
이런 사람이 있냐고 물으니...그 사람 왈 그런 사람이 1600명은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흠 여기서 질문, 그렇게나 많이?

암튼 그래서 거기서 온 사람은 맞는 것 같은데
전번을 줘서 찝찝하다고 하니까
유어 네임 이즈 민...? 하고 묻는 것이다.
난 시컵을 하여 하우 두 유 노우 마이 네임? 했다
그랬더니, 아이 얼레디 해브 유어 콜러 아이디 쇼잉 유어 폰 넘버 엔 유어 네임 온 마이 폰.
하는 것이다.-_-;;;

나는 허탈했다. 전화까지 해서는 내 전번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렛잇고하는 수 밖에.

그렇지만, 기분이 싫어서 어떻게 하면 내 콜러 아이디가 리스트릭트로 나오는지 구글해 보았다.
방법은 *67+1 이다.
다음에는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


아 찝찝해.

Thursday, May 27, 2010

[Paranoia agent]



드뎌
시즌4까지 끝내고

최근 끝난
어이없는 로스트의 막 장면

보다 더 훨씬 그래도
설득있는 엔딩이었다

그래도 최근에 본 것들중에
내게 영감을 주었다고나 할까

Tuesday, May 18, 2010

개구리로 환생한 피노키오? 신종 개구리 발견




[서울신문 나우뉴스]코가 길어 슬픈…개구리?

피노키오 처럼 긴 코를 가진 희귀한 외모의 개구리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왈라비(캥거루과의 동물) 등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동물들은 '잃어버린 세계'로 불리는 인도네시아의 포자산맥에서 발견했으며, 이밖에도 지금까지 보고되지 않은 비둘기·쥐 등 새로운 동물들도 함께 발견됐다.

특히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마치 코가 긴 피노키오를 연상시키는 개구리로, 코가 작은 돌기모양으로 생겨서 '피노키오 개구리'로 불린다.

평소에는 코가 아래를 향해 있다가 주위에 소리가 들리거나 활동량이 많을 때는 피노키오처럼 코가 앞 또는 위로 올라간다.

이 개구리는 포자산맥의 한 캠프기지를 방문한 양서류 전문가인 폴 올리버가 발견했으며, 이후 국제환경보호단체가 탐사를 벌인 결과 가장 작은 캥거루로 기록된 왈라비와 거대 들쥐 등이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환경보호단체는 "30만 헥타르의 초자연지대인 포자산맥을 반드시 기록해야하며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곳을 더욱 각별히 보존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Wednesday, May 12, 2010

[아스토리아에서의 막날]



오늘 받은 사진...
이날 이삿짐을 보내고
집 비워주기 위해 집청소를 뻔질나게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경이 곤두섰던 나는

레슬리와 떨어져야 한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서히 실감이 나는 것이다.

12시 넘어 배도파 가는 식당 가는 길에 비가 엄청나게 왔다.
우산마저도 실어 보낸 우리는 무작정 뛰었다.

우리는 다시는 함께 달리지 못할 그 거리를 그렇게
아무런 동요없이 달렸다.
흐르는 빗물을 털털 마음만은 추스리자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이까짓것 수많은 이별중 하나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애써 웃으며 우리는 수천 칼로리의
쥬이시한 육즙을 가진
그 햄버거와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뭔가 잊으려는 듯 미친 듯이 먹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이미지들 중 한 컷.

떨어져 지내면 우리는 어느새
변해 있을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말야.

마음이 먹먹해진다.

[Love &Theft]

Friday, May 7, 2010

Fun Chindogu



“밤길이 무섭다면”…자판기 위장 치마 등장


[서울신문 나우뉴스]

밤길 치한을 만났을 때 이 발명품을 이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본 의류 디자이너가 최근 밤길이 두려운 여성들을 위해 순식간에 음료 자판기로 위장할 수 있는 다용도 치마를 공개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디자이너 아이야 츠키오카(31)는 "길거리에 음료 자판기가 많은 일본에서 이 보다 더 안전하고 기발한 옷은 나올 수 없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얼핏 보기에는 일반적인 긴 치마지만 위급한 상황이 되면 요긴한 위장용품이 된다는 것. 양 옆에 있는 끈을 풀러 치마 끝을 머리 위로 올리면 음료 자판기 앞면이 그려진 천이 등장한다.

디자이너는 "영화 '닌자 어쌔신'에서 주인공들이 한 밤 검은색 망토를 펼쳐 몸을 가리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 "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벌에 7만원 정도하는 이 치마는 지금까지 단 20벌이 팔린 것으로 전해졌다. 디자이너는 이 치마와 함께 위급 상황에 맨홀 뚜껑으로 위장할 수 있는 이색 가방을 선보이기도 했다.

실용성 면에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디자이너는 데일리메일과 한 인터뷰에서 "서양에서는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충분한 활용가치가 있는 옷"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베프의 결혼

중학교때부터 쭈욱
가족과도 같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오월 오일날 결혼을 하였다

나는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쓸쓸하다
씁쓸하다

갈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이곳에서 이렇게 지낸 다는 것이
정말 애중간하고
그런 것 같다

동생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완전 신신당부했더니
착한 녀석 꼼꼼하게 많이도 찍었다

또 곧바로 보내주는 나의 착한 동생.
사진을 보니 왠지 마음이 짠한 게 그렇다.

기쁜데, 또 짠하다.

잘 살아야 해 지혜야

Wednesday, May 5, 2010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미스박의 집에 갔다가
들고온 두권의 책 중의 한권.
지금 내 상황이 책을 읽을 군번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원래 그런 상황이 아닐 때 읽으면 더 재미가 있다.

뭐 중편정도의 길이어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에니웨이...

뭔가 감동이 있다라던지
재미가 있었더라던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고등학생 (최연소 유명한 상 두번 받으신 작가분)이
쓴 소설이다.

그래서 인지, 나랑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세계를 엿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런 것이 있었다. 하기는 세월이 지나도 누구나 한번 쯤은 가질 수 있는
고민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풀어 나가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하는지는
사람마다 세대마다 다른 것 같다.

이 소설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 처한 세대는
나보다 한 열살 이상 아래의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아이들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라는 제목이 좀 신기하기도 했고...
왜 발인지, 왜 등짝인지느
읽다보니 알게 되었다.

소통.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어 친구들은 그룹을 나뉘어 친구들끼리 뭉쳤다.
그러나 여주인공은 그렇게 같이 있지 못했다.
중학교 때의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어떤 기억이
(사실, 이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사건이 아니고, 그저 여러 친구들과 다니면서 소통을 할 수 없었을 때의 상실감등등..이 아닌지 가물가물)
그녀로 하여금 벽을 쌓게 만든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것(내가 그녀를 이해하기에는)이 벽을 쌓았는지...

그러던 중 그녀는 반에서 그녀처럼 혼자 남겨진 어떤 남자아이를 보게 된다.
혼자가 된 이유는 너무나 다르다. 여자아이는 어떤 소통에 대한 희망이 있고, 못 본척 혼자가 될 때마다 아파하지만, 그는 오직 한곳만 바라본다. 어떤 연예인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는 언제나 상상속에서 그 연예인과의 세계에 늘 빠져 있다. 그녀는 그에게 호김심이 생기고, 그 연예인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단지 그녀가 그 연예인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고, 그녀를 자신의 집에 초대까지 하여 그 때 상황을 물어본다.

늘 등을 웅크리고 그 세계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여자아이는 우연을 가장하여 (이게 가능한지..의심쩍었지만) 발로 그의 등을 발로 찬다. 그녀가 왜 그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알 필요도 없고)

그녀는 그 남자아이를 발로 차서 깨워서 소통하길 바란다. (바라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 사이에 감정이 예민해져 가는 것 같다.
소설은 그것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이 신기하게도 꾸밈이 없는 서체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Wednesday, April 28, 2010

죽은 자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에 서다


▲ 네크로폴리스


ⓒ 지은경



3개월간의 긴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에서의 삶이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봄 햇살은 북부에도 강렬하게 비치고 있었다. 산책하는 곳곳마다 수선화와 벚꽃이 만발했다. 기술적 실업 상태에 놓인 우리는 험상궂은 하늘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여행 중 지나쳤던 장소들을 하나 둘 찾아나서기로 했다.


죽은 자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에 가다



▲ 네크로폴리스.


ⓒ 지은경



스페인 북부, 소리아 지방의 쿠이야 카브라스(Cuya Cabras)에 있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네크로폴리스는 기원전에 만들어졌다는 이론과 중세시대의 흔적이라는 이론이 팽팽하게 대립된다.

작은 바위 동산 하나가 시신을 담던 무덤들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다. 물론 시신을 안착할 당시에는 엄청난 무게의 바위를 그 위에 얹었을 것이다. 덮개바위는 모두 사라져 인체의 형상을 한 홈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키가 컸던 사람, 작은 사람, 갓 태어나자마자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기들의 자리도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많은 죽음의 자리 위에 올라 산책을 하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 있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이 세 가지의 질문 중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빼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떤 때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혼란을 겪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우리는 시간이라는 긴 끈으로 항상 이어져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우리도 같이 흘러간다. 시간은 다음 순간으로 항상 이어져 있으며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장소도 결국 어떤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다.

늙어가고, 움직이고,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고, 여행을 하고, 그리고 수많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며 생을 영위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죽음이 과연 삶의 끝일까? 아니다. 종교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죽음은 또 다른 형태의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이 세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세대와 교류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죽어서 흙이 되고, 흙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를 여행하다가 시냇물을 타고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가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거친 기나긴 여행 끝에 어느 누군가의 입안을 적시는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의 몸은 사라지지만 우리의 본질은 영원히 이 땅에 남을 것이다.

아주 먼 곳에 있더라도 어떤 작은 움직임이 또 다른 움직임을 낳고 이어지고 또 이어져 지금의 내가, 이 장소에서, 누군가와 함께 어떠한 일을 도모한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구들 동료들, 모든 만남은 아주 오랜 과거, 어쩌면 인류의 시작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조율 중 어느 하나라도 달랐다면 다음의 작용들이 변화해 지금 이 현재는 곧 다른 모습이 된다.

삶의 해답을 찾는 여행은 계속해야 한다






▲ 네크로폴리스.


ⓒ 지은경



이 세밀하고 연약한 듯한 연결고리들은 무수한 바뀜이라는 경우의 수들을 지니고 있지만 절대 고리가 풀리는 법은 없다. 고고하고 거대한 그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이루어진 지금의 나의 모습, 내가 느끼는 감정과 숨 쉬는 공기, 이 모든 것들은 전해지고 전해지며, 또 누군가에게 어쩌면 다른 형태로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또 얼마나 멀리까지, 어떠한 형체로 전달될 것인가?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듯한 기막힌 우연으로 내가 누리는 지금이라는 소중한 시간, 무엇으로 계속 채워가야 할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직은 모르지만, 우선은 그 해답을 찾는 여행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각 나라마다 장례의 풍습이 틀리고 무덤의 형상이 다를지라도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은 동서양,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바람을 이루려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은 자, 이끼 그리고 지금 그 누군가





네크로폴리스 숲의 한 귀퉁이에서 우리는 바위 위에 새겨진 죽은 자들을 위한 에르미타를 발견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그려진 문, 그 문 안으로 우리는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당시 죽은 자들은 그곳을 들어갈 수 있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염원, 그리고 염원을 담은 열정은 오랜 시간을 담고도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Wednesday, April 21, 2010

살아 있는 인형? 베트남에서 촬영된 신기한 강아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인형같은 강아지가 해외 네티즌 사이에서 인기다. 미국의 한 사진작가가 베트남 냐쨩에 있는 사원에서 촬영해 블로그에 공개한 ‘생명체’의 모습은 귀엽고 신비하며 의아스럽다. 털 색깔이 매력적이고 헤어스타일(?)이 개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시선이 특히 집중되는 것은 바로 얼굴 표정. 얼굴은 몸과 어울리지 않으며 사람 얼굴과 닮았다는 평가다.

[a lover loves]



lesley recommended, highly
but i like it, too

Friday, April 16, 2010

와 정말 쿨하지 못해 미안해

for fun - style sheet



해 놓고 보니 무척이나 소녀적이라고 해야할까
내 안에 숨어있는 소녀 ㅋㅋ

청자켓 갖고싶당

Thursday, April 15, 2010

이럴이럴이럴수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전여옥
대단하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꼬리의 꼬리를 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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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없다’ 항소심을 끝내고 나서
전여옥과 만난 후, 19년간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풀다

유재순 제이피뉴스 발행인
1월 13일 아침, ‘일본은 없다’ 재판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당연한 결과지만 1심에 이어 2심도 승소했다.

판결결과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5년 반 동안의 재판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분노, 억울함, 재판, 불면증, 신경쇠약 등등. 그래도 용케 견뎌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래서 담담하게 그동안의 재판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거짓말 1. 첫 만남

90 년대 초였던가. 당시 나는 동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한국주간지 특파원으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때 중앙일보 문화부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KBS 기자로 있는 후배가 도쿄특파원으로 가니 사람도 좀 소개시켜주고 돌봐주라.’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기꺼이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는 친구의 부탁대로 한 아름 꽃을 사 들고 NHK 방송국 안에 위치한 KBS 도쿄지국을 찾아가 전여옥을 만났다. 물론 당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날 저녁 NHK 국제국 스태프들과 함께 회식도 했다.

그 당시 나는 3년 단위로 NHK 국제국 라디오 한국어 방송과 계약을 체결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KBS에 들러 잠깐 전여옥을 만난 것이었다. 또한, 방송이 끝난 후 회식을 할 때 국제국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얻어 전여옥까지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때의 상황을 전여옥은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 앞 부문 생략…원고(전여옥)가 일본에 간 지 한 2주 정도 지났을 때 유재순이 원고를 NHK 지국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당시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아울러 유재순에 대하여 호감도 갖게 되었습니다... 중간부문생략 그리고 일본에서 원고를 가끔은 써도 한국에서처럼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항소이유서 5쪽).>

2004년, 내가 오마이뉴스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여옥은 거짓말의 천재다.’라고.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거짓말의 천재였다. 그것도 얼굴색깔 하나 변하지 않고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했다.

전 여옥은 항소이유서에서 위의 인용문장에서처럼, 나를 아주 빈한한 유학생 마누라로,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 여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라고 큰 아량을 베푼 것처럼 묘사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100% 거짓말이다.

나는 전여옥을 만나는 첫날부터 내 지인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고, 이 같은 관계는 그녀가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게다가 당시 나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80년대 중반 이후 몇 년은 매월 여성동아 원고를, 그 이후에는 우먼센스, 세계여성, 일요신문 등 시사주간지 원고를 번갈아 가며 쓰느라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아 사히 신문사 계열의 시사주간지 <아사히저널(현재휴간)>, 아사히그라프 등에도 일본르포를 쓰면서 그 틈틈이 다른 일본 주간지나 월간지에 칼럼까지 썼다. 또한, 매월 두세 차례씩 JAL항공사, 시민단체 등에 강연을 다녔다.

일본에서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6년에 내 르포집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81 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의 생활(혹은 르포)을 기록한 나의 원고가 ‘신동아 논픽션’에 당선되면서, 이후 나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수년간 ‘여성동아’ 에 매월 10여 페이지 정도의 사회 저소득층에 대한 심층르포를 썼다. 또한, 주간지 ‘스포츠동아’에는 내 룸메이트였던 미국여성 메리의 도움을 받아 3년에 걸쳐 취재한 이태원 르포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 런데 신기한 것은 일본언론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1년에 두세 차례씩 강연요청이 들어 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주재 일본 특파원들이 나에 대한 기사를 꽤 여러 번 쓴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일관계가 이슈가 될 때마다 어김없이 일본에서 강연, 혹은 대담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87년 중반에 일본에 유학을 왔을 때는, 자주 일본을 왔다갔다해서인지 일본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덕분에 취재를 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동안 닦아놓은 인맥만으로도 취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의 인맥을 풀가동하여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우노 수상 등 웬만한 역대 수상을 차례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나에게 전여옥은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전여옥은 그런 말을 할 게제가 못됐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맥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에 재직하고 있던 내 친구가 자신의 후배라며 전여옥을 소개시켜 준 이유도 바로 내 인맥을 소개받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녀는 사실과 반대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의적으로 꽃을 사 들고 간 사람에 대해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라고 마치 내가 대단히 가난한 유학생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묘사’를 했다.

아 마도 전여옥은 한국사회의 ‘프리랜서’에 대한 인식이 희박함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하려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이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촌평은 재판 내용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항소이유서 상당 부분을 나에 대한 인신공격, 그것도 대부분 인간적으로 비하하는 듯한 내용을 작문으로 지어 기술했다.

1987-94년 말까지 유학하는 동안 우리 집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기 이전이어서 일본거주 한국유학생이나 일본에 오는 여행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만큼 유학생들은 외로움을 많이 탔고, 또 여행자들은 여행자들대로 언어불편이나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는 곳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한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우리 가족끼리 잠을 자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 집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손님 중에는 국회의원, 연예인, 샐러리맨도 있었고 나중에는 돈 떨어진 여행객이 유학생의 소개로 재워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아파트는 105,106호 두 개를 빌려서 살았고, 손님이 많은 만큼 대형 냉장고 두 대가 풀가동됐다.

이 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 큰오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 그 당시 제법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큰오빠는 형제 우애가 대단히 강했다. 그래서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남편을 도쿄지사장으로 발령을 내고, 그 월급과 3개월마다 지급되는 보너스를 고스란히 우리 생활비로 쓰게 했다. 거기에 나의 원고료, 강연료 수입이 더 있었다.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대부분의 유학생들에 비해 우리 가족의 생활은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런 연유로 유학기간 동안 3년에 걸쳐, 매년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 7-8명을 초청하여 민단 조총련에 관계없이 재일동포들의 애환과 실상을 듣고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내 개인적으로 주최하기도 했다.

이 때 의원들의 초청경비 및 진행에 드는 비용은 대략 300-500만엔 정도. 그 부담은 모두 내가 원고료, 강연료로 충당했다. 다만, 진행에 있어 자원봉사 형식으로 유학생들의 힘을 빌렸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아랫지방 규슈에서부터 북의 홋카이도까지 재일동포들은 자신들에 대한 기록을 한 아름 안고 도쿄 심포지엄 장소로 달려오곤 했다. 그때 매년 재일동포들을 위해 행사장에 나와 무료로 법리적 해석을 해주신 분이 바로 재일동포 변호사 1호 고 김경득 씨였다.

이런 연고로 94년 12월 4일 한국으로 귀국할 때, 200여 명의 일본기자들과 재일동포들이 '하품의 일본인' 출판기념을 겸한 송별회를 요츠야 사학회관에서 거나하게 베풀어 주었다.

이런 나를 가리켜 전여옥은 자신이 도와주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라고 표현을 했다.

전 여옥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표현을 한 이유는, 도작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상황적 우위에 서기 위함이다. 내가 일이 없어 수입이 없고, 그래서 빈한하게 생활한다는 것을 나타내, 그런 나를 동정해서 격려하고 도와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항소이유서 또 다른 페이지에서 형편이 매우 어려운 나를 동정해서 많이 도와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 지만 도움을 준 것은 전여옥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여옥에게 내 일본인 인맥과 재일동포들을 소개시켜 주고, 그리고 집에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했다. 반대로 내가 전여옥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에 돌아가서는 거꾸로 내게 자신의 인맥을 소개시켜 주고 도움을 준 것처럼 진실을 호도했다.

<…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항상 원고를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했고 글을 계속 쓰라고 격려했고 원고가 귀국할 때는 원고의 가재도구도 소파며 세탁기, 냉장고 등 살림이 어렵다 해서 다 주고 왔을 정도였습니다…항소이유서 9쪽).>

만약 나를 모르고 우리 집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전여옥의 이 같은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주로 상대방을 사주는 쪽이었지 얻어먹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나를 아는 기자들이나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다.

또 한, 전여옥이 대부분 나를 찾아왔지 내가 찾아간 적은, 그녀의 특파원 생활 동안 세 손가락 안에 손꼽을 정도다. 내가 취재원 혹은 일본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늘 전여옥을불렀고, 그러면 선약이 있지 않는 한 그녀는 그 장소가 우리 집이 됐든 도쿄시내이든 간에 어디든지 달려왔다.

식사비? 몇 번 얻어먹은 적은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베푸는’ 차원의 대접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 리고 특파원 생활을 끝내고 귀국할 때 자신이 쓰던 물건을 다 내게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물건들은 내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유학생들에게 나눠 준 것이다. 물론 그녀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도 항소이유서에는 마치 나를 도와주기 위해 그 물건을 준 것처럼 이 역시 호도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주재원이나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대개 사용하던 물건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간다. 일본에서는 버리는 것도 돈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전기 제품은 버리는 데도 한 개당 최소 5천엔 이상을 줘야 가져간다.

때문에 귀국하는 사람은 이삿짐을 싸기 전 필요한 사람을 알아보고 이사하는 날 나누어주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 재 우리 집에 있는 낡은 피아노는 다섯 집을 거쳐 내 딸아이 것이 되었고, 작년 여름에는 귀국하는 주재원의 냉장고가 우리 집 냉장고보다 새것이어서 기꺼이 물려받았다. 대신 우리 집 냉장고는 구청을 통해 5천 엔을 주고 가져가게 했다.

나는 평소 내 주변의 주재원 중에 귀국하는 사람이 있으면, 쓸만한 물건이 있나 물어보고 있으면 그 물건들을 받아 놓았다가 나중에 필요한 유학생들에게 나누어 준다. 전여옥에게 받은 물건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필요한 유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그 럼에도 내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가전제품을 다 주고 귀국했다'라고 항소이유서에 뻔뻔하게 기술해 놓았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그 물건들이 탐난다고 해도 우리 집에 들여놓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이미 두 채의 아파트에는 내 책과 문학전공인 남편의 책으로 빈 공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형냉장고 두 대가 방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어서 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사정을 잘 모르는 재판부의 약점을 이용해, 유학생들을 위한 선의의 내 행동을 항소이유서에서는 사실을 100% 왜곡해서 기술했다.

결정적인 왜곡 또 하나. 그녀가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에게서 20만 엔을 꾸어갔다. 이유는 결혼할 준비로 보석을 사야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 꾸어줬다(나중에 서울에 가서 받음).

만약 내가 그녀가 표현하는 대로 그렇게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면 한 번에 20만 엔씩이나 하는 목돈을 흔쾌히 꾸어줄 수가 있었을까?

결국, 전여옥은 ‘사람 소개시켜 주고 먹여주고 재워 준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행위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뒤의 항소이유서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 전여옥의 항소 이유서 ©JPNews/ 김현근

거짓말 2. 표절 소문

<… 유재순은 원고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하며 ‘일본은 없다’는 표절이라고 했습니다. 기자들도 원고에게 문의했습니다. 그래서 원고는 잘됐다 싶어 ‘그렇다면 공동 기자회견을 하자. 그래서 가릴 것은 가리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동기자회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유재순 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었습니다(이점에 관하여는 당시 이를 주선하였던 레이디경향의 유인종 기자의 확인서를 제출한 바 있음).항소이유서9쪽>

나의 1차 일본생활은 87년 6월부터 94년 12월까지이고, 2차 생활은 99년 2월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생활한 기간은 95년 1월부터 99년 1월까지 4년간이다. 그리고 ‘일본은 없다’가 출판된 것은 93년이고.

아마도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바로 이 기간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한국에서의 생활 동안 전여옥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버젓이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화번호나 주소를 몰랐다면 그것 또한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95년 2월 내가 딸아이를 낳자 가장 먼저 달려온 친구가 바로 전여옥을 내게 소개시켜준 중앙일보의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전여옥과는 이화여대, 학보사 직계 선배였고, 두 사람 모두 언론계에서 일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는 관계였다. 따라서 우리 집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자회견이 있는 줄도 몰랐을 수밖에.

더더구나 기가 막힌 것은 전여옥이 기자회견을 주최했다는 유인종이라는 잡지기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1심에서는 그의 진술서도 제출했단다.

그 래서 우리 측에서도 그 당시 여성동아, 우먼센스 편집장의 진술서를 받아 법정에 제출했다. 물론 기자회견에 대한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잡지의 경우, 어떤 기자회견이 있을 때는 편집장에게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은 다음에 취재를 가더라도 가야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여성동아, 우먼센스 편집장을 비롯하여 다른 매체 편집장들도 그런 보고나 사실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없다’에 대한 소문은 언론계나 출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여서, 기자회견이 있다면 일부러 찾아가서 취재를 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들은 적도,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당시 잡지편집장들은 한결같이 증언했다. 나는 당연히 이 증언을 기록한 진술서를 받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한, 2심 재판에 당시 우먼센스 편집장이 우리 측 증언자로 나와 그때의 잡지계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또 하나 더 큰 결정적인 거짓말은 내가 유인종 기자와는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유인종 기자를 처음 본 것은 2심 재판 법정에서였다.

법정에서 우리측 송호창 변호사가 유 기자에게 물었다.

“유재순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유재순 씨의 집 전화번호를 압니까?”

“모릅니다.”

“아니 유재순 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유재순 씨에게 기자회견을 한다고 연락을 했습니까?”

“후배가 했습니다.”

“그럼 그 후배이름은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 이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국회 청문회를 할 때 의원 나리들이 자신의 잘못을 에둘러 감추려할 때마다 상습적으로 남발하는 말이다.

이러면 바로 상황 끝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삼척동자라도 잘 알 것이다. 고로 '공동기자회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유재순 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은 불필요하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100%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온갖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하며 ‘일본은 없다’는 표절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기술했던 말도 100% 거짓말이다.

94 년 12월 4일에 귀국한 나는 그때 임신 8개월이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전여옥 부부가 전화를 걸어와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대며 서울에 오면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해, 나는 한국에 귀국해서도 진짜 무서워 위해를 당할까봐 아이를 낳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 없이 조용히 지냈었다.

그때 전여옥뿐만 아니라 그 남편까지 나서서, ‘옆집 신발공장에서 똑같은 신발을 만들었기로서니 뭐가 잘못이냐. 우리에게는 돈과 힘이 있다’고 아주 당당하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전 여옥 부부가 번갈아 가며 8개월 된 임산부를 상대로 험한 말을 쏟아 부을 때, 우리들의 대화를 메모 혹은 머릿속에 메모리 형태로 기록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소 우리 집에 와서 자주 밥을 먹던 유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을 나중에 서울에 귀국한 후에야 알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집은 105,106호 아파트 두 채를 빌려서 살았다. 손님도 많고 책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전화를 양쪽 집에 연결해서 사용했다. 그 때문에 전화가 오면 양쪽 집에서 똑같이 받을 때가 자주 있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전여옥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도 양쪽 집에서 수화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바로 이를 유학생들이 번갈아 가며 메모를 했고.

한국에 귀국해서 잠시 들른 유학생을 만났을 때, 그 유학생은 내게 서류 한 통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그 전화통화 내용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서류였다. 그것도 일본에서 공증까지 해서 말이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는 당시 그 유학생은 내게 말했다.

“사 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유학생들은 앉으면 전여옥 이야기인데 혹시 나중에 법정소송으로 갈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유학생들의 증언을 모아서 공증해서 갖고 온 거예요. 혹시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몰라서요. 그러니 잘 보관하고 계세요.”

그의 말대로 나는 10년이 지나서 법정에 섰다. 내 성격에 생각지도 못한 소송이었다. 그것도 피해를 당한 사람이 피고가 돼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 유학생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조차도 ‘전지모(전여옥을 지지하는 모임)’는 전여옥이 자신의 말이 녹음되는지도 모르고 마구 욕을 하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엉뚱하게 추켜세웠다.

아 무튼 95년 2월,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모유를 먹였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이후에는 집안의 우환으로 바깥 활동을 할 겨를이 없었다. 또 약 8년에 걸쳐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고는 친밀하게 지내는 기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물며 상황이 이러한 데 일일이 찾아다니며 울고불고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낯 간지러워서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울며불며 언론사를 찾아다녔다? 내 성격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그런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전여옥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특 히 전여옥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그녀가 언론매체에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야기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자회견에 대해서도, 어떤 매체에는 내가 ‘기자회견장에 안 나오고 도망갔다.’라고 하고, 또 다른 매체에는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을 격려해 주었다.’라고 전혀 상반되는 말을 했다. 그리고 2심 항소이유서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취소했다고 또 다르게 기술했다.

‘기자회견장에 안 나오고 도망갔다.’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을 격려해 주었다.’

‘일방적으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각 각 다른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전여옥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매체에 따라 장소에 따라 말이 달라졌다. 또 기자회견을 주최하고 나에게 연락을 했다는 유 기자도 나와는 법정에서 만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초면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이 모든 거짓말이 매스컴을 상대로 한 ‘언론 플레이’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다.

▲ '일본은 없다' 표절공방, 19년만에 풀어놓는 이야기 ©JPNews/ 김현근

거짓말 3. 사실 호도

전여옥의 특징과 장기는 자신의 허물을 역으로 남의 허물로 뒤집어 씌우는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 원고가 ‘일본은 없다’를 낸 지 한 2-3년 뒤 유재순은 ‘하품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는 서문부터 원고에 대한 악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에 원고는 참을 수 없어 아는 출판사에 ‘이젠 법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뒤 며칠 뒤 유재순이 책을 거두어 들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재순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쓴 책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라고 밝혔지만 원고 생각에는 소송을 할까 봐 겁이 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 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항소이유서10쪽’>

먼저 ‘하품의 일본인’이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하 품의 일본인’은 일본에서 먼저 낸 책이다. 아니 원래는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이름으로 나왔어야 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 반 이상을 전여옥이 가져갔다. 대화내용, 취재수첩메모, 초고 등 가져가는 방법도 다양했다.

물론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올 때까지 나에게 단 한마디도 책을 쓴다는, 준비한다는 이야기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서울에서 전화를 걸어온 기자 친구를 통해서였다.

“야, 근데 니 책 내용이 왜 그 애 책에 다 나오니?”

그때서야 내가 철저하게 전여옥한테 당한 것을 알았다.

나 는 전여옥을 만나기 전부터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밝혔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일본기자들이나 내 독자들은 내가 어떤 류의 책을 준비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자료나 취재원이 있을 때는 그들은 협력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런 만큼 나는 친구로 지내고 있는 전여옥한테도 당연히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에 관계된 초고는 물론 취재현장으로부터 곧바로 그녀를 만날 때는 취재수첩을 보여줘 가며 현장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이 런 나에 대해 '보여준 사람이 바보가 아닌가'라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다. 전적으로 수긍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우선 전여옥은 입으로 말하는 방송기자였고, 나는 철저한 현장취재를 통해 글로 쓰는 르포라이터였기 때문에, 그녀가 내 것을 가져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보여주고 빌려주고 때로는 취재현장 정보가 필요할 때는 팩스로 보내 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가 출판될 때까지 지나가는 말로라도 내게 언급한 적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내가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의 내용 반 이상이 ‘일본은 없다’에 옮겨간 사실을 안 후 난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목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즉 목이 마비된 것이었다.

아마 그날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정 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 일찍 그 당시 NHK 라디오 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마츠이 히로코 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래서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 있는 ‘나카무라야’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듯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재순 씨 억울해서 어떡해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만 유재순 씨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작가잖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없어요. 전여옥 씨는 내가 친하게 지내서 잘 아는데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너무 마시고 놀기만 했어요(飲みすぎだった、遊びすぎだった).”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사실은 그날 아침 나와 만나기 전에 전여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전여옥이 자신에게 ‘일본은 없다’를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양심상 도저히 번역할 수가 없어서 거절하는 편지를 부치고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했다.

그날 마츠이 씨는 내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을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도작당한 내 입장에서 먼저 분노를 터트려주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으니 너무 상심 말라’는 따뜻한 위로까지 해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철저하게 전여옥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노스러워 혼자 꺼억꺼억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앉았다 일어서려고 보니 갑자기 목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갑자기 앉지도 일어서지도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날부터 난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닐 때는 목에 깁스 띠를 두르고 로봇처럼 시선을 한 곳에만 고정시키고 걸어 다녀야 했다.

그때 나는 인간의 머리가 그렇게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 한 인간의 분노가 그렇게 한순간에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바보로 만든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래서 한 달 가까이 누워지냈고, 그 이후부터는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일 정도로 머리가 무겁고 통증이 심해 몇 분도 채 안돼 자리에 도로 누워야 했다. 모든 것이 지옥이었다. 전여옥의 전자만 생각해도 목의 통증은 더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불면증까지 겹쳐 이중의 고초를 겪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많은 유학생들이 돌아가며 나를 돌봐주었다는 것이다. 번갈아가며 반찬을 해왔고, 내 속옷은 유학생 부인들이 빨아주었다.

그렇게 약 3개월간을 고생했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전여옥 이야기나 ‘일본은 없다’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어가 되었다. 서울 시집에서는 몸조리하라고 두 재의 한약을 지어서 보내 주었다.

아 이로니컬한 것은 그 한약 두 재를 먹고 현재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번째 아이를 가지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30대 후반에다 너무 바빠서인지 도무지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집에서 보내준 보약 두 재를 먹고 나니 몇 개월 후 덜컥 임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들 녀석과 딸애의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나 난다.

아무튼, 임신이 된 사실을 알고서 많이 안정이 되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최면을 걸었기 때문이다.

임 신 5-6개월이 되었을 즈음, 소문을 듣고 평소 친하게 지냈던 일본출판사 사장인 다카기 씨가 찾아왔다. 도작당한 사실과 ‘일본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 대한 미련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른 책을 한번 내보자는 권유를 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하품의 일본인’이다. 책 제목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제목 역시 다카기 사장이 서점을 돌며 앙케트 조사를 한 끝에 직접 지은 것이었다. 그의 지론은 이 세상에 상품(上品-품격있는)의 인간이 없다는 것.

▲ 하품의 일본인, 일본은 없다 ©JPNews/김현근

' 하품의 일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8년간 일본생활을 하면서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일본인이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점만을 꼬집어 정리를 한 것이다. 때문에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와 ‘일본은 없다’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하품의 일본인’의 서문에 내가 도작당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을 뿐이다. 이같은 서문 내용이 인터넷상에서 ’펌’ 형태로 널리 퍼져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솔직히 난 몰랐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나중에 비로소 알았다. 왜냐하면 2004년까지 내가 컴퓨터 사용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에서 조회 수가 그렇게 많은지도 재판이 시작된 후에야 겨우 알았다.

오죽하면 스포츠조선에 ‘일본은 지금’이라는 타이틀로 월,화,수요일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메일이 아닌 워드로 친 원고를 매번 팩스로 보내자, 담당기자가 제발 컴퓨터 좀 배우라고 매일같이 닦달했을까. 그래서 내 별명이 ‘천연기념물’이었다.

아무튼 95년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다시 ‘하품의 일본인’을 출판한 뒤, 출판사 부부와 책 홍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이상한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하고 장소도 프레스센터로 정한 뒤였다. 내게 기자들에게 줄 봉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일간지는 50만 원, 주간지는 30만 원, 월간지는 20만 원씩 넣은 봉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래야만 되는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상대편은 훨씬 더 많은 봉투를 기자들에게 뿌렸다는 것이었다. 3천만 원이란 구체적인 액수까지 댔다.

즉 시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액수단위가 낮아졌다. 30-20-10만 원으로. 이 역시 거부했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면서까지 왜 기자회견을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그럼 점심값만 이라도 준비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는 투로 설득해 왔다. 그렇게 새벽까지 실랑이를 했다.

결국, 그날 새벽 장문의 편지를 써서 팩스로 출판사에 보냈다. 내용은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면서까지 홍보를 해서 책을 팔고 싶지 않다는 내 의중을 적었다.

팩 스를 받은 출판사는 이튿날 우리 집으로 사장동생인 전무를 보냈다. 책이 재판에 들어갔으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하품의 일본인’의 판매중지를 요청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책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때까지 나는 꽤 여러 권의 책을 내서 매번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지만, 비정상적인 홍보를 해서 책을 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줘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열심히 현장에서 취재해 기사를 쓰다 보니 특별한 선전없이도 책이 잘 나갔다.

훗날 전여옥이 책을 팔기 위해서 표절문제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고 비난했는데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때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가 처녀출판이었고, 반면 나는 그동안 르포집, 장편소설 ‘난지도 사람들’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기본 부수만 몇만부 하는 식의, 출판계에서 일컫는 이른바 기본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 군에 속했다. 때문에 누구의 힘을 빌려, 혹은 화제를 만들어 책을 팔아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없이 ‘하품의 일본인’의 판매중지를 결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의 반응이 좋아 3개월마다 한 번씩 목돈의 인세가 들어오는 등, 정신적인 여유로운 배경도 판매중지를 결정하는데 한몫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출판사로 보낸 이 편지는 나중에 전여옥이 '소송을 당할까봐 자진 수거를 했다(항소이유서10쪽)' 고 또다시 누명을 씌워 증거물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한, 위의 항소이유서 내용 중, '…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같은 이야기는 바로 전여옥 자신의 이야기를 거꾸로 나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99년 일한문화교류기금을 받아 호세이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유학을 왔을 때, 오자마자 2년 동안 칼럼을 게재한 것이 바로 아사히신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도 한 달에 한 번씩 아사히신문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뿐 만 아니라 현재 한국주재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중에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해 만나고 떠난 기자도 있다. 그리고 2,3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송년회는 한국에 나가 아사히신문,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출신 기자들과 함께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사히신문 기자들과 완전히 절연이 되었다니?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혹시 전여옥 본인의 이야기?

그리고 괄호 안의 ‘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이 란 말이 있는데, 이도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에게 잘해 준 것이라고는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도무지 하나도 없을뿐더러, 나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도 아직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본 여행 도와준 것이 피해라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거짓 4. 'TV 아사히'의 날조

2심 재판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한 가지 느낀 사실이 있다. 전여옥이 블랙코미디 전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 그러나 원고가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원고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피고들은 원고를 비방할 목적으로 원고가 유재순의 저작물을 표절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오선화 문제이고 거의 모든 주일 특파원들이 다뤘던 문제였습니다…항소이유서 18쪽>

‘원고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피고들은 원고를 비방할 목적으로..’

이것은 ‘일본은 없다’ 121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어쩌랴. 전여옥의 이 주장 자체가 100% 거짓말이니.

그럼 121페이지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일본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점에서 어떤 한국인이 쓴 것 같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름은 ‘스카트노 가제(スカートの風)', 우리나라 말로 ‘치맛바람’이란 뜻이었다…중간생략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사히 텔레비전에 나온 그 책을 쓴 오선화라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카사카와 신주쿠의 한국인 호스티스의 이야기를 하며 몹시 거칠고 서툰 일본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온 호스티스들의 꿈은 일본남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녀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너무나 살기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중간생략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그토록 욕을 하고 미워하는데도 너그러움으로 그것을 감싸며 한국인들에게 잘해 주고 있습니다.” 오선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한국사회는 지독하게 부패했습니다. 모두가 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중간생략 나도 사실은 육사생도나 군인과 결혼하는 것이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여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나 육사생도와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 영문학을 공부하러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오선화는 흥분한 듯 말했다. “일본사람들은 정말로 너그럽습니다. 나는 사실 한국인과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위 문장대로라면 분명 전여옥의 주장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선화가 텔레비전에서 말했다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내가 쓴 초고와 너무나 똑같았다.

▲ '일본은 없다' 중에서 오선화 부분 ©JPNews/김현근

나는 오선화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1년 넘게 그녀의 행적을 추적했었다. 그 과정에서 ‘스카트노 가제’로 인해 지도교수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도쿄대학 대학원 유학생도 만났다.

나중에는 그 유학생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오선화에 대한 취재를 다니기도 했다. 이 유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은 없다’ 126페이지에 나온다.

<… 앞부분 생략…흥분한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이러한 책이 나오지 못하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깎아내리는 이 형편없는 책을 교재로 쓰겠다는 일본인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을 가장 객관적으로 본 책’이 나왔다며 세미나 주제로 삼아 한국인 학생들에게 억지토론을 시킨 일본인 선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교수들은…중간생략 …그래서 교수와 설전을 벌이다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학생도 많고 어쨌든 학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치사하고 억울해도 분을 삭이며 두고 보자 하면서 듣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틀리게 기술한 부분까지도 전여옥은 그대로 자신의 책에다 인용했다.

‘그래서 교수와 설전을 벌이다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학생도 많고’

사실은 오선화의 책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간 유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취재과정에서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전여옥은 이렇게 잘못 취재한 내용마저 마치 자신이 진짜 취재한 것처럼 버젓이 ‘일본은 없다’에 기술했다.

또 하나 도작문장의 실례를 들어보자.

'한국인들이 한국을 가장 객관적으로 본 책’이라는 표현은 도쿄대 유학생이 나와 인터뷰를 할 때 지도교수가 한 말이라면서 내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그대로 원고에 썼다.

그런데 이 적확한 표현이 그대로 전여옥의 책에 인용됐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떻게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녀의 책에 나올 수 있나. 더구나 그 유학생은 전여옥을 만나기는커녕 전화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그 유학생은, 2심 재판 때 법정에 나와 126페이지에 나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했다.

다시 TV 아사히(일본에서는 아사히 텔레비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TV 아사히라고 부른다)의 중계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문장 내용으로 봐서는 분명 전여옥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쓴 글인데, 내용은 내 초고 원고내용이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항소이유서에도 당당하게 기술할 만큼, 본인은 TV 아사히를 보면서 썼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먼 저 TV 아사히를 찾아갔다. 그리고 오선화가 출연했는지의 여부부터 확인해 봤다.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오선화가 '아사히'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한 자체가 없었다. '한국은 성형 천국'이라는 한낮에 방송하는 와이드쇼에 나와 잠깐 몇 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번에는 다른 채널의 출연분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없었다. NHK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 역시 ‘일본은 없다’ 121-122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결국 '일본은 없다'121-122페이지에 나오는 오선화의 TV출연은 100% 전여옥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 원고 내용을 그대로 도용한 것.

그것을 자신의 것(내용)으로 전개, 혹은 위장하기 위하여 TV 아사히를 살짝 도입시켜 삽입시킨 것뿐이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도 자신이 TV를 보며 원고를 쓴 것처럼 작문을 했다.

이 같은 방법은 '일본은 없다' 내용 곳곳에 나온다. 그 방법의 도구로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주간지, 월간지, 지인 등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총동원하여 이들로부터 인용한 것럼, 들은 것처럼, 앞의 TV아사히처럼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켰다.

이 런 형태로 도작을 당한 사람은 비단 나혼자만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 특파원 출신 B씨는 그래서 전여옥에게 직접 항의를 한 적도 있다고 내게 털어 놓았다. 그리고 작년 9월, 재판을 위해 서울에 갔을 때, B씨는 자신이 당한 사례(핸드폰으로 나와 통화한 것을 녹음하여) 를 재판부에 밝혀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오선화가 출연했다는 방송을 모두 수집하여 녹취록을 뜬 다음 한국어로 번역하여 비디오테이프와 함께 증거물로써 재판부에 제출했다.


▲ 일본은 없다 중 포스트 잇으로 체크한 도작 부분. 책의 대부분이 포스트 잇으로 덮혀있다. ©JPNews/ 김현근


거짓말 5. 좌파정권과 좌파언론이 사주했다?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르포라이터로서 현장취재를 해왔지만, 정치색깔을 나타내는 기사를 쓰거나 그 어떤 정당에 적을 둔 적도 없다.

언 론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내가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것은, 현장의 ‘있는 그대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좋은 것은 좋은 것 그대로, 나쁜 것은 나쁜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르포라이터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가서 1년 8개월 동안 쓰레기를 주우며,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사람들의 실생활을 그렸고, 구로공단 공장에 가서는 한 달 동안 위장취업을 해 여성근로자들의 하루 일과를 엿보았다.

또한, 고학력, 있는 집 자녀들이 이태원에 가서 아무 의식 없이 미군들과 기타 외국인들을 상대로 쾌락을 위해 함부로 몸을 내던지는 소위 ‘이태원 걸’ 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3년에 걸쳐 그 실상을 파헤쳤다.

덕분에 나는 당시 블랙마켓을 하며 한국여대생들을 농락하는 독일 남자를 용산경찰서에 고발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잭나이프로 내 허리를 찌르기 직전 내 룸메이트였던 메리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뿐 만 아니라 당시 <스포츠동아>에 약 2년에 걸쳐 연재하는 동안, 집시족 같은 미국인을 가리켜 ‘노랑머리새끼’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미국대사관에서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압력이 들어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와 데스크는 끝까지 단 한 개의 용어도 고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연재물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강연차 어떤 모임에 갔을 때, 관중의 몇 사람이 대한의 딸들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나!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었노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처럼 이태원의 실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이 목숨을 건 르포를 두고 전여옥은, ‘대 학졸업 여부도 확실치 않고 (아마 신정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나를 비하하려는 의도를 갖고 표현한 듯) 르포작가로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책을 낸 것– 제목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태원의 여왕벌’ 하는 식의 제목으로 기억됨- ’이라고 항소이유서(6쪽)에 적고 있다.

하 긴 표절의혹을 제기하는 일본주간지의 전화인터뷰에서도 전여옥은, '자신은 일류대학 출신의 공영방송기자이고, 유재순은 3류대학의 프리랜서’라고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비하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표절의혹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아 비웃음만 샀다. 그런 전여옥이니 목숨을 건 르포 따위야 아무런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인터뷰를 한 일본주간지 기자가 오히려 내게 되물었었다.

"그 사람 일본특파원 지낸 것 맞습니까?"

이 유는 일본에서 대형사건을 취재하여 파헤친 기자는 대부분 프리랜서들이기 때문이다. <주간문춘>에 록히드 사건을 파헤쳐 다나카 가쿠에이 현직 수상을 구속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프리랜서 '다치바나 다카시'였고,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재일동포 차별에 의한 인질사건의 범인 김희로 씨의 일대기와 재일동포 역사를 추적한 ‘김의 전쟁’ 저자도 바로 르포라이터 '혼다 야스하루' 씨였다.

위의 두 사람은 모두 유명출판사에서 전집 발행이 된, 일본에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논픽션의 대가이자 거장 프리랜서다.

그럼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창피한 줄 모르고 일본 언론매체에 대고, 자신은 일류대학 출신의 명품을 휘두른 공영방송기자, 나는 3류대학의 남루한 옷을 걸친 프리랜서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 일본기자들로부터 '진짜 기자출신 맞아?'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제아무리 명품 옷을 걸치고 일류대학을 나왔다 한들, 인품이 명품이 아닌 하품(下品)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전여옥 자신만 모르고 있다.

▲ '일본은 없다'에서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미조라 히바리'라고 기술했다. 이는 유재순 발행인이 초기에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JPNews/ 김현근

아무튼, 내 직업은 현장중심의 르포라이터다. 성격이 이런 만큼 전여옥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무현 좌파정권이나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의 꼬임에 넘어가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고 할 만큼 좌지우지될 그런 성격이 결코 아니다.

1심 승소 후, 전여옥이 패소의 변으로 '노무현좌파 정권과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가 유재순을 앞세워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일체 오마이뉴스와 접촉을 하지 않았다.

2심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이 한국을 오가면서도, 오마이뉴스 기자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피했다.

이 유는 간단했다. 전여옥에게 핑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1심 초반 무렵 재판과정이 오마이뉴스에 보도되어, 이 또한 보도되지 않게 변호사를 통해 정식으로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재판과정에 대한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재순은 선, 전여옥은 악'이라는 이분법의 여론재판이 아니었다. 팩트는 하나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현실적인 권력을 쥐고, 세속적인 잣대로 나를 비하하고 모멸감을 주며 질겅질겅 밟는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사회정의가 살아 있다면 정녕코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나와 전여옥이 공통적으로 관계가 있는 지인들에게 온갖 추잡한 협박을 가해도, 그들은 조용히 내게로 다가와 손을 잡아준 것이 나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큰 버팀목이 됐다.

2심 재판정에서 현재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출신 영사부인이 이런 증언을 했다.

"전여옥 씨의 특파원 시절, 우리 부부가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씨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자기가 책을 쓰고 있는데 유재순 씨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특파원이 취재한 내용도 들어 있다고 본인한테서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한 일본인 외교관 부인은 그날 저녁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다시 한번 주둥이를 잘못 놀리면 네 혀를 잘라 놓겠다. 그리고 네 남편을 한국에서 추방시켜 버리겠다."

그 런데 신기한 것은 외교관의 집 전화번호를, 그것도 부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된 일본영사의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것이다. 특별한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일반인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집 전화번호는 아니다. 결국, 재판과 관련된 사람이 협박전화를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전여옥은 계획적으로 내가 준비하고 있던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의 책 내용을 가져갔다는 얘기가 된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아직 저작권법에 대한 의식이 전무할 때였다. 아마 지금 상황이라면 그녀도 남의 것을 감쪽같이 도용한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전여옥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한다.

당 시 내가 원했던 것은 '미안하다'라는 사과 한마디였다. '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과하다보니 본의아니게 네 것을 좀 가져다 쓰게 됐다. 미안하다.' 이 말이면 나는 그냥 덮어둘 생각이었다. 내 성격에 친구가 좀 욕심을 냈기로서니 하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내심정이었다.

그런데 전여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질겅질겅 짓밟는 것도 모자라 학력비하에, 목숨을 걸고 취재한 르포까지 천박하다고 몰아세우고, 내 주변사람에게는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이간질을 시켰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내라고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이 제사 이야기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아픔이 아니다. 배신처럼 쓰라린 아픔은 없다. 그것도 사람의 신분상승에 따라 말도 태도도 아주 대단히 세속적으로 달라져 간다는 것. 나는 그런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배신의 차원을 넘어 인간적으로 슬프기까지 했다.

맨처음에는 나보다 더 분노하고 흥분해서 어쩔줄 몰라 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본인이 나서서 대신 토로해주던 사람이, 전여옥이 한나라당 대변인에서 국회의원 신분이 되자, 언제 그런말을 했느냐는 식으로 태도가 확 돌변했다. 그래서 당연한 현상이지만 전여옥을 위해 써주는 진술서 내용 또한 그렇게 점점 변해갔다.

2 심 판결 후, 너무도 많은 전화를 받아 내귀가 윙윙거릴 지경이다. 한결같이 자기일처럼 걱정해 주고 믿어주었던 지인들이다. 아마도 이런 분들 때문에 그나마 아무것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유일하게 '사람'뿐이니까.

한가지 나를 믿어준 가족들과 지인 그리고 독자들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작년 11월 그 때 나는 서울에 있었다. 내가 현재 만들고 있는 제이피뉴스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금마련은 뜻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마침 그때 변호사로부터 합의조정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왔다. 재판부는 물론 전여옥측에서도 합의를 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세번은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 때 많이 흔들렸다. 제이피뉴스 운영자금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급전이 필요한 만큼, 그래서 내가 변호사한테 말했다. '그동안 재판에 들어간 실제비용만 전여옥측에서 토해내도 합의를 해주겠다'고. 그 정도로 난 운영자금의 필요성으로 절박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여옥측은 합의만을 원했다. 당연히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 금 생각하면 지난 5년 반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많이 부끄럽고 또 죄송스럽다. 적어도 전여옥과의 재판에서 '사회정의'를 생각했다면,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주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었다면, 그런 타협같은 것은 애시당초부터 생각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일시적이나마 그런 '타협'을 시도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타협'은 나를 비켜갔다. 아마도 그 '타협'이 받아들여졌으면 2심 승소 판결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이 점 독자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다.

이제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지금까지는 그저 힘있는 그녀를 방어하기에만 바빴다. 그것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온갖 거짓말과 술수를 워낙 잘 쓰는 그녀의 본질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권모술수에 아주 능한 전여옥이 또 어떤 논리와 왜곡, 모함을 가지고 공격해 올지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당한 만큼, 내 소중한 가족과 지인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은 그 몇 배만큼, 온전히 되돌려받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이제부터 조용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내 책 내용으로 전여옥 입맛에 맞게 그 내용을 왜곡해서 일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 그 행태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나 는 일본의 있는 그대로를 전해주려고 했지, '일본은 없다'라는 제목처럼 그렇게 극단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왜곡하고 각색해서 반일, 혐일감정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려는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 전여옥은 남의 책 내용을 계획적으로 도용해 자기 입맛에 맞게 대단히 선동적으로 각색해서 '일본은 없다'를 만들어 버렸다.

그 래서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일본에 대해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증오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재 일본 모습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일본을 바로 아는 것이기에, '도작사실'부터 분명하게 정리를 한 다음, 다음 행동에 나설 것이다.


■ 편집자주

이 글은 이번 2차 '일본은 없다' 관련 항소심 판결에 대한 유재순 제이피뉴스 발행인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입니다. '보도자료'를 대신해서 작성한 것이므로 인용 및 전재, 재배포가 가능합니다.

Tuesday, April 13, 2010

방 학 끝

“나무 위는 싫어요”…고소공포증 가진 부엉이



“나무 위는 싫어요”…고소공포증 가진 부엉이




[서울신문 나우뉴스]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새가 있을까?

영국 햄프셔 지방의 한 매 보호구역에 사는 '트로이'(Troy)는 태어난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부엉이다.

트로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숲속에서 상처를 입은 채 발견됐으며, 그때부터 이곳 관리인인 가레스 토던의 보호아래 자랐다.

트로이의 상처는 곧 아물었지만, 토던은 얼마 후 어린 부엉이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숲 속 밤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졌을 만큼 비행에 능숙하며, 높은 나무위에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엉이가 '고소공포증' 증세를 보인 것이다.

트로이가 올라갈 수 있는 높이는 약 170㎝가량으로, 관리인인 토던의 어깨높이 정도다.

나무 위에 올려놓으면 1초도 지나지 않아 지상으로 내려오는가 하면, 도무지 토던의 어깨 위로는 날려고도 하지 않는다.

햄프셔 매 보호구역의 조류 전문가는 "아무래도 트로이가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포비아를 가진 것 같다."면서 "자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의 어깨 높이가 자신의 한계점이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스로를 부엉이 또는 새라고 여기지 않고 사람이라고 여기고, 사람의 머리 위로 가지 않으려는 것으로도 추정된다."면서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새의 사례는 접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Friday, March 26, 2010

소독차

를 쫓아서 달렸다

허여언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작은 트럭을

우리들은 힘껏 쫓았다

지금은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은
어떤 소년은 내게

그 연기를 마시면
이빨에 뭐가 난다고 했다

나는 설마했는데

다음날 나는 나의 오른쪽 앞이빨에 난
작은 뽀두락지를 발견했다

어 정말이네
그아이의 말이 맞았네

안 없어지면 어쩌지했는데

어느날 나는 뽀두락지가 어디갔지?
찾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뽀두락지가 없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빨이 빠져서 새로운 이빨이 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 까지
이십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갑자기 난 그 이빨위에 난 뽀두락지가 그립다

Thursday, March 25, 2010

이제야 조금
아주 조금

아니 아주 많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나는 이미 적응이란 것도 없이

이곳에 있다

2월 말에 이곳 콜럼버스로 이주해 오고
지금 한달여가 지났다

75%정도 정리는 지나고
아직 박스 몇개는 그대로 있다

새 포도주는 세 부대에

Monday, March 8, 2010

[사진]거꾸로 뒤집어진 무지개




8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의 쾌청한 하늘위로 거꾸로 뒤집어진 무지개가 떠 있어 출근길에 지나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시간은 오전 8시 45분부터 9시15분까지 30여분간 모습을 보인 뒤 사라졌다.

기상청은 이러한 현상을 채운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채운현상이란 고층대 구름사이로 태양광의 회절 또는 간섭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채운은 오색의 구름 경운 또는 자운으로 불리면서 예전부터 매우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왔다.

거꾸로 무지개는 아치형의 일반적인 무지개와 달리 아래쪽이 둥근 모양인데다, 맨 위쪽이 보라색, 맨 아래쪽이 빨강색이다. 이 같은 무지개는 전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은 현상이라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진풍경으로 여겨진다.

뒤집힌 무지개로 보이는 채운현상은 남극이나 북극에서 가끔 발견된다고 한다.
*회절-파동이 장애물의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현상
*간섭-둘 또는 그 이상의 파동이 서로 만났을 때 중첩의 원리에 따라서 서로 더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

Wednesday, February 10, 2010

[오오오하이오오오]



레슬리에게

13일 동안 쿨쿨…희귀병 걸린 ‘잠자는 미녀’

마법에 걸려 잠에 빠진 동화 속 공주처럼 한번 잠에 빠지면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영국 소녀의 안타까운 사연이 외신에 소개됐다.

MSNBC 뉴스에 따르면 루이자라고 알려진 15세 소녀는 몇 년 전부터 한번 잠에 빠져들면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희귀병에 시달리고 있다.

소녀가 앓는 클라인-레빈 증후군은 흔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증후군'이라고 불린다. 전 세계 1000명 안팎의 환자가 있는 이 병은 기면증과는 증상이 다르며 한번 잠에 빠져들면 최장 몇 달 동안 깨어나지 못한다.

한번 잠에 빠지면 며칠 동안 못 일어나기 때문에 일상의 계획은 어긋나기 일쑤다.

루이자는 "가족 여행을 떠났는데 계속 잠만 자서 눈을 떴을 때는 다시 내방 침대였다."면서 "춤 경연 대회에 나갔는데 대기실에서 잠이 들어 경기를 포기해야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소녀의 어머니인 로티는 "최장 13일 동안 잠만 자는 딸이 행여 굶어죽을 까봐 흔들어 깨우기도 했으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면서 "루이자가 잠 때문에 또래친구들이 누리는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동화 속 공주는 왕자의 사랑의 키스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지만 희귀 증후군을 앓는 루이자의 잠을 깨울 치료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스탠포드 대학 기면발작 센터의 엠마뉴엘 미그노트 박사는 "루이자가 앓는 희귀병의 원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면서 "10대 때 주로 나타나며 성인이 되면 자연 치유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Thursday, February 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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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실종 여고생 감쪽같은 `이중 생활'(종합2보)

학교도 속고 보육원도 속고 경찰도 속아
(경주=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경북 경주에서 지난달 5일 학교를 나간 뒤 연락이 끊겼다 지난 2일 소재가 확인된 김은비(17.고교 2년)양이 그동안 감쪽같은 이중 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양은 만17세가 아닌 실제로는 20대 나이로 2006년 이미 가출신고가 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4일 경찰에 따르면 소재가 파악된 김양의 조서를 받은 결과 당초 김양이 1992년생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989년생이었다.

또 김양은 2006년 경주의 한 복지시설을 찾은 이후 이미 실종신고가 돼 있었으며 연락이 끊긴지 이틀 뒤인 지난달 7일 실종신고가 해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용인경찰서 관계자는 "김은비양은 현재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아 치료를 요하는 상태다"면서 "김양은 실제로 89년생이고 성은 알려진 '김'이 아니라 '이'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또 "부모는 경기도 집에 함께 살고 있으며 김양은 실종 다음날 집으로 찾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양은 4년전인 2006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 어머니가 써준 편지라며 편지 1통을 들고 경주지역 한 복지시설을 찾았으며 호적도 없는 상태로 편지에는 1992년생이고 이름이 은비라고 적혀 있었다.

이후 김양은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면서 2006년 9월 기아발견으로 호적을 취득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해 고등학교에 입학, 기숙사 생활을 해왔다.

김양은 지난달 5일 오후 3시께 보충수업을 마치고 장학금 관계로 경주지역 한 복지시설에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학교를 나선 뒤 담임교사에게 전화한 이후 연락이 끊겼으며 지난 2일 경기도 어머니 집에 있는 것이 확인됐다.

김양은 실종 다음날인 6일 오전 5시43분께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서 휴대전화를 켠 사실이 확인됐으나 이후 휴대전화는 꺼진 상태였다.

이후 경찰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경기 경찰과 공조하는 등 수사를 확대했으며 지난 2일 김양의 외삼촌이 실종관련 뉴스를 보고 확인한 결과 어머니 집에 있어 경찰에 전화했고 경찰이 소재를 확인했다.

한편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경주 경찰은 "이미 범죄와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돼 수사가 종결된 상태여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해당 여고 게시판에는 "드라마같은 일 때문에 네티즌도 속고 경찰도 속고 보육원도 속고 학교도 속고.." 등의 어이없다는 반응이 잇따르고 있으며 해당 복지시설도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경찰은 전했다.

Wednesday, February 3, 2010

[리뷰]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픽사가 마음 놓을 수 없는 이유

[이동진닷컴] (=이동진) 디지털 애니메이션 세계는 확실히 춘추전국시대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Cloudy with a chance of meatballs, 211일 개봉)은 픽사 스튜디오가 이 분야에서 지난 십수년간 확고한 아성을 쌓아왔음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픽사를 포함한 디즈니와 드림웍스가 힘 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폭스와 워너가 맹렬히 추격하는 형국이었던 디지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후발주자 소니는 서핑 업이나 부그와 엘리엇같은 평범한 작품들을 늘어놓은 뒤 드디어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으로 제대로 경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최근 디지털 애니메이션 분야 곳곳의 주목할 만한 성과들은 뛰어난 선두 주자가 경쟁자들까지도 훌륭하게 단련시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이야기에 깊이를 부여하고 캐릭터에 감성을 불어넣는 수준에서 여전히 니모를 찾아서’ ‘’ ‘-E’ 같은 픽사의 대표작들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드림웍스의 쿵푸 팬더가 그랬듯, 애니메이션 장르가 발휘할 수 있는 시각적 재미와 오락성에 관한 한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최상급의 솜씨를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발명에 몰두했던 플린트는 수많은 실패 끝에 마침내 수분을 음식으로 바꿔내는 기계를 만들어낸다. 플린트가 평생 살아온 섬에 도착한 초보 기상캐스터 샘은 때마침 기계가 처음 작동해 수많은 햄버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관을 목격하고 전국으로 방송한다. 탐욕스러운 시장은 기계를 이용해 야망을 채우려고 플린트에게 점점 더 과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무척이나 매끄럽고 능숙한 애니메이션이다. 내내 가속페달을 밟으면서도 시종 동력을 잃지 않는 이 작품은 한바탕 휘몰아치는 대목에서조차 익살스럽게 쉬어가는 쇼트를 능란하게 넣을 정도로 완급조절 능력도 뛰어나다. 작은 체리 하나 때문에 거대한 음식의 산이 일거에 무너져내려 마을을 덮치는 장면이나, 정어리 한 마리가 고비를 계속 넘긴 끝에 간신히 살았다고 환호하는 순간 갈매기가 채가는 장면처럼 신(scene)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의 유머러스한 리듬 감각도 좋다.

축복이 재앙으로 바뀌면서 음식 재난영화가 되는 이 작품은 극중 상황이 최근 개봉한 영화 더 로드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듯 하다. 햄버거 비와 도넛 우박에서 스파게티 폭풍까지, 수많은 음식들이 위에서 떨어지거나 앞으로 밀려오는 설정이 많기에 3-D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입체감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감각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도 많아서, 엄청난 양의 치즈버거들이 보라색 구름을 뚫고 처음 쏟아지는 부분은 색감과 운동감이 압도적이다. 두 남녀가 반투명 젤리로 만든 성에서 낭만적인 데이트를 하는 대목은 촉감과 양감이 탄성을 자아낸다. 아이스크림 눈이 색색으로 내린 아침의 눈싸움처럼 서정적인 풍경도 있다. 가족 멜로 코미디 어드벤처 액션 등의 장르적 요소를 뒤섞어 모두 충족시키는 화법은 흡사 관객들을 푸짐한 뷔페 식당으로 끌어들이는 듯 하다.

서른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원작 동화를 성공적으로 각색해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기본적으로 기발하고 신선한 스토리 라인에 실팍한 살을 입힌 이야기는 부자(父子)간의 따뜻한 관계회복기이면서 동시에 건강한 패자부활전으로도 제대로 기능한다. 탐욕이 낳은 엄청난 사태 앞에서 인물들이 저마다 삶의 교훈을 깨닫게 되는 결말도 진부함이 적다. (다만 이 도덕적 우화에서 메시지에 대한 조급증과 감동에 대한 강박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소니는 아직 픽사가 아니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의 연출자는 이 작품으로 데뷔하게 된 필 로드와 크리스 밀러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크레딧에서는 영화의 주인에 대해 일반적인 경우처럼 감독 이름을 넣는 대신, ‘많은 사람들’(A film by a lot of people)이라고 표기한다. 거기에 담긴 것은 한두 사람의 예외적인 재능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모여 영화 한 편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작은 감동이다.


이동진 이동진닷컴 대표 lifeisntcool@naver.com

'이동진의 부메랑인터뷰', '필름 속을 걷다',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등 출간.
KBS FM <유희열의 라디 오 천국> '이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쿡TV '무비스 토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함께 보는 다시보기' 등 진행.

다른기사 보기이동진 블로그 '언제나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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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어린이 술' 성황리 판매…"한 잔 하실래에?"

이 음료수는 맥주병과 똑같은 용기에 담겨 있으며, 컵에 따르면 진짜 맥주처럼 거품까지 올라온다. 눈으로는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짜 맥주. 맛은 사과 탄산음료와 비슷하다.

일본에서 이 어린이용 맥주를 만든 이유는 일본 특유의 '배려심'에 있다. 일본은 가족 모임을 포함해 그룹으로 모여 술을 마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도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문화를 잘 살려 개발한 이 어린이용 가짜 맥주는 출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이 여세를 몰아 곧 어린이용 샴페인, 와인, 칵테일까지 나올 예정이다.

이렇듯 가짜 술음료가 매출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지만 이를 둘러싼 논란도 만만치 않다. "단지 음료수일 뿐이다" "아이들도 술자리의 분위기 정도는 느낄 수 있는게 아니냐"라는 옹호 입장이 다수지만, "아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다" "아무리 가짜 술이라도 음주문화에 너무 일찍 젖어 드는 게 아니냐"는 걱정의 목소리도 높다.

Tuesday, January 26, 2010

...

[시네마레터] 고양이보다는 황소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로프’는 성화(聖畵)를 그렸던 15세기 러시아 화가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참혹한 세상 속에서 신념과 희망을 잃고 좌절과 무력감으로 표류하던 류블로프는 결국 언어까지 버린 채 침묵에 빠집니다.

이 영화의 종반부에서 세상을 떠돌던 류블로프는 어느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생히 목격하게 됩니다. 권력자가 거대한 종(鐘)을 얻기를 원하자 종 만드는 장인(匠人)의 아들인 보리스카라는 소년이 죽은 아버지 대신 자신이 만들 수 있다고 나섰던 거지요. 사실 소년은 종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배고픔에 못 이겨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동원된 가운데 오랫동안 작업을 지휘하던 소년은 외형이 완성된 종을 모두가 모인 가운데 시험 삼아 쳐보게 되는 날,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타종 후 신비로운 기적이 이뤄지듯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보리스카는 바닥에 주저 앉아 아버지로부터 종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은 적이 없었다고 울먹이며 토로합니다. 그런 소년을 안고 위로하던 류블로프는 15년간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엽니다. “얘야, 함께 가자. 나는 가서 그림을 그리고, 너는 가서 종을 만들자꾸나.”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 주인공은 자신이 운영하는 화실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느 유명 화가의 발언을 생각나는 대로 옮긴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그 주인공이 인용한 화가였던 척 클로스는 “가장 좋은 아이디어들은 모두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아이디어가 떠오른 뒤 그에 토대해 창작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일단 창작을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통념과 달리, 훌륭한 창작자는 고양이보다는 황소에 훨씬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작가는 엉덩이로 쓴다는 말까지 있을까요. 좋은 예술가는 그저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창작 환경의 한계와 창작 능력에 대한 회의와 소통의 장벽과 아이디어의 고갈 속에서, 그들은 만들고 또 만듭니다.

‘안드레이 류블로프’에서 종 만드는 소년 에피소드의 핵심은 아마도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야기는 예술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화로도 읽힙니다. 보리스카는 변변한 재료조차 구하기 힘든 창작 환경의 한계 속에 있었습니다. 종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자신의 창작 능력에 대한 회의도 극에 달해 있었지요. 누구와 속 시원히 터놓고 상의할 수도 없으니 소통의 장벽도 넘을 수 없었고요. 어떻게 제작해야 되는지 모르기에 아이디어 역시 고갈 상태일 수 밖에 없었고요. 그가 해냈던 단 한 가지는 그저 계속 만드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대책 없는 노동은 결국 영화의 말미에서 의미를 얻어냅니다. 그리고 15년간 창작력을 상실했던 또 다른 예술가 류블로프는 그 모습을 목격하고서 마침내 창작욕구를 회복합니다. 그 순간 류블로프가 깨달은 것은 ‘창작의 의미’가 아니라 ‘창작하는 행위 자체의 의미’였을 겁니다.

어디 예술만 그렇겠습니까. 의미를 찾으려는 사랑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동반하게 된 사랑은 더 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또 사랑할 뿐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삶은 선험적인 의미만으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의미를 발견했다고 안심하든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당황하든, 의미 이전이나 이후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할 날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의미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빚는 것이니까요.

Saturday, January 23, 2010

...

누군가 그러던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지적 허영심이 있단다

마지막
아마존의 눈물

호옷 호옷 호오옷 호옷
조에족
브라질 아마존 북부지역에

조에족의 사냥

끼리리리끼리리리
끄어러억

오옷 오옷오옷

모니는 조에족 최고의 사냥꾼

아나쿤다처럼 거침없이 밀림을 누비고
원숭이처럼 수십미터 나무에도 오릅니다

꾸끄끄끄

직접 만든 활로

Tuesday, January 19, 2010

Color of the Year for 2010

Pantone Unveils Color of the Year for 2010:
PANTONE 15-5519 Turquoise

Turquoise Transports Us to an Exciting, Tropical Paradise While Offering a Sense of Protection and Healing in Stressful Times

CARLSTADT, N.J., Dec. 8, 2009 –Pantone LLC, an X-Rite company (NASDAQ: XRIT), and the global authority on color and provider of professional color standards for the design industries, today announced PANTONE® 15-5519 Turquoise, an inviting, luminous hue, as the color of the year for 2010. Combining the ser
ene qualities of blue and the invigorating aspects of green, Turquoise evokes thoughts of soothing, tropical waters and a languorous, effective escape from the everyday troubles of the world, while at the same time restoring our sense of wellbeing.

“In many cultures, Turquoise occupies a very special position in the world of color,” explains Leatrice Eiseman, executive director of the Pantone Color Institute®. “It is believed to be a protective talisman, a color of deep compassion and healing, and a color of faith and truth, inspired by water and sky. Through years of color word-association studies, we also find that Turquoise represents an escape to many – taking them to a tropical paradise that is pleasant and inviting, even if only a fantasy.”


Whether envisioned as a tranquil ocean surrounding a tropical island or a protective stone warding off evil spirits, Turquoise is a color that most people respond to positively. It is universally flattering, has appeal for men and women, and translates easily to fashion and interiors. With both warm and cool undertones, Turquoise pairs nicely with any other color in the spectrum. Turquoise adds a splash of excitement to neutrals and browns, complements reds and pinks, creates a classic maritime look with deep blues, livens up all other greens, and is especially trend-setting with yellow-greens.


In fashion, Turquoise makes a statement that can look elegant and dressy in fine silk and gemstones, or casual and fun in cotton and athletic apparel. Because of its versatility, Turquoise is a great accent color in jewelry, purses, shoes, hair accessories and even nail polish for women, and ties, shirts and sportswear for men.


For brides wanting a flattering choice for attendant apparel and accessories on their big day, Turquoise is now one of the nearly 200 PANTONE WEDDING Colors available from Dessy, a leading manufacturer of bridesmaid, social occasion and flower girl dresses, as well as destination wedding gowns under the labels Dessy Collection, After Six, Alfred Sung, Lela Rose Bridesmaid and Sandals Destination Wedding Dresses. PANTONE WEDDING exclusively from Dessy provides a collection of color tools to make it easy for brides to achieve perfectly color-coordinated weddings – from inspiration to “I do.”

Additionally, Turquoise is one of 3,000 colors available in Pantone’s line of superior-quality, eco-friendly paint. PANTONE Paints combine the accuracy of PANTONE Colors with the beauty of high-performance Dutch paints. Perfect for a powder room or bedroom, Turquoise is an evocative, spa-like hue that adds an undertone of warmth and excitement to any cool space. In the kitchen, Turquoise adds a unique flare to tabletop and appliances.

Wednesday, January 1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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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냄새 추적해 치킨도둑 잡은 ‘사장님’
뉴시스 | 기사입력 2010.01.13 18:18
【청주=뉴시스】엄기찬 기자 = 배달 오토바이에 있던 치킨을 훔쳐 먹은 대학생들이 치킨 냄새를 추적한 끈질긴(?) '사장님'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13일 충북 청주흥덕경찰서에 따르면 고교 동창인 대학생 A씨(20) 등 5명은 지난 8일 오후 2시께 동창생 B씨(20)의 원룸에서 한 치킨 전문점에 치킨 3마리를 주문했다.

전날 함께 술을 마신 이들은 허기와 쓰린 속을 달래야 했지만 모두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던 A씨 등은 각각 다른 원룸 3곳으로 각각 1마리씩의 치킨을 동시에 주문한 뒤 배달원이 한곳에 배달을 간 사이 오토바이에 남아 있는 치킨을 훔쳐 먹자는 묘안을 짜냈던 것.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이용하기도 한 이들은 얼마 후 치킨 배달 오토바이가 나타나자 배달원이 치킨 1마리를 들고 다른 원룸에 들어간 사이 오토바이에 있던 치킨 2마리를 훔쳤다.

그러나 그들의 치킨 포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번째 배달처에서 허탕을 친데다 오토바이에 있던 치킨마저 도난당한 치킨 전문점 주인이 치킨 냄새를 추적하며 원룸촌 일대를 뒤져 이들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치킨 전문점 주인의 신고로 2만6000원 상당의 치킨 2마리를 훔쳐 먹은 A씨 등은 결국 특수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돈이 없어 이 같은 범행을 모의했던 A씨 등은 경찰 조사에서 대부분 현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서로에 대한 배신감을 또 한번 느껴야 했다고 경찰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