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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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레터] 고양이보다는 황소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로프’는 성화(聖畵)를 그렸던 15세기 러시아 화가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참혹한 세상 속에서 신념과 희망을 잃고 좌절과 무력감으로 표류하던 류블로프는 결국 언어까지 버린 채 침묵에 빠집니다.

이 영화의 종반부에서 세상을 떠돌던 류블로프는 어느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생히 목격하게 됩니다. 권력자가 거대한 종(鐘)을 얻기를 원하자 종 만드는 장인(匠人)의 아들인 보리스카라는 소년이 죽은 아버지 대신 자신이 만들 수 있다고 나섰던 거지요. 사실 소년은 종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배고픔에 못 이겨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동원된 가운데 오랫동안 작업을 지휘하던 소년은 외형이 완성된 종을 모두가 모인 가운데 시험 삼아 쳐보게 되는 날,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타종 후 신비로운 기적이 이뤄지듯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보리스카는 바닥에 주저 앉아 아버지로부터 종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은 적이 없었다고 울먹이며 토로합니다. 그런 소년을 안고 위로하던 류블로프는 15년간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엽니다. “얘야, 함께 가자. 나는 가서 그림을 그리고, 너는 가서 종을 만들자꾸나.”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 주인공은 자신이 운영하는 화실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느 유명 화가의 발언을 생각나는 대로 옮긴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그 주인공이 인용한 화가였던 척 클로스는 “가장 좋은 아이디어들은 모두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아이디어가 떠오른 뒤 그에 토대해 창작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일단 창작을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통념과 달리, 훌륭한 창작자는 고양이보다는 황소에 훨씬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작가는 엉덩이로 쓴다는 말까지 있을까요. 좋은 예술가는 그저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창작 환경의 한계와 창작 능력에 대한 회의와 소통의 장벽과 아이디어의 고갈 속에서, 그들은 만들고 또 만듭니다.

‘안드레이 류블로프’에서 종 만드는 소년 에피소드의 핵심은 아마도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야기는 예술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화로도 읽힙니다. 보리스카는 변변한 재료조차 구하기 힘든 창작 환경의 한계 속에 있었습니다. 종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자신의 창작 능력에 대한 회의도 극에 달해 있었지요. 누구와 속 시원히 터놓고 상의할 수도 없으니 소통의 장벽도 넘을 수 없었고요. 어떻게 제작해야 되는지 모르기에 아이디어 역시 고갈 상태일 수 밖에 없었고요. 그가 해냈던 단 한 가지는 그저 계속 만드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대책 없는 노동은 결국 영화의 말미에서 의미를 얻어냅니다. 그리고 15년간 창작력을 상실했던 또 다른 예술가 류블로프는 그 모습을 목격하고서 마침내 창작욕구를 회복합니다. 그 순간 류블로프가 깨달은 것은 ‘창작의 의미’가 아니라 ‘창작하는 행위 자체의 의미’였을 겁니다.

어디 예술만 그렇겠습니까. 의미를 찾으려는 사랑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동반하게 된 사랑은 더 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또 사랑할 뿐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삶은 선험적인 의미만으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의미를 발견했다고 안심하든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당황하든, 의미 이전이나 이후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할 날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의미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빚는 것이니까요.